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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이미지 꽃씨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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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시간

서브타이틀이미지 꽃씨 심다

형제 많은 집안에서 빠른 취업을 위해 공고에 진학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후 그 소년은  자라 기능올림픽 선수단에 들어가고 제88호 최연소 기능한국인이 됐습니다.  자신이 가진 기술로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엑셀러레이터로 성장하며,  맨몸으로 100억대의 강소기업을 일군 아이빌트(주) 이준배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글 민정민 | 사진 김지원

빠른 취업을 위해 기술 배운 8남매 중 막내


이준배 대표는 대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집안의 분위기는 모계 중심이라 경제활동과 자식 뒷바라지가 어머니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요. 남편의 몫까지 일당백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의 모습과 교육방식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또래보다 철도 일찍 들게 되었죠. 

“당장에 효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빨리 제 앞가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머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거죠. 취업을 잘하려면  기능훈련이 중요하니 자연스레 고등학교도 공고로 진학했어요.” 


최연소 기능한국인? “운이 좋았죠”


그는 특성화 고등학교 다니면서 성실히 기능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추천으로 기능올림픽 선수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막상 출전했는데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다고 후회가 남는다고 해요. 

“지방대 나와서 은메달을 땄고 전국대회 나가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어요.  기능올림픽 선수단에 들어간 이유는 조건이 좋아서였어요.  실업선수단에 들어가게 되면 급여와 높은 연봉, 군 면제 등 재밌는 것이 저는  원래 주전이 아니라 후보였어요. 근데 주전이었던 선배가 실격하면서 제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었죠.” 

그는 자신이 최연소 기능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운이 좋아서라고 겸연쩍게 말했습니다. 

“기능인이라고 하면 보통 마에스트로(장인) 이미지여서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자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노력과 운에 따라서 빨리 될 수도 있다는  하나의 예가 제가 된 거죠”



  • 여러 번의 진급 누락, 사업에 뜻을 품다


    기능올림픽 선수단으로 들어갔던 당시 금성(현 LG)에서 그는 번번이 진급에 실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사출 금형 설계, 제품설계, 특허 회피 설계 등을 했었어요.  당시 가장이었기 때문에 회사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었죠.  급여나 연봉에도 전혀 불이익이 없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진급이었어요.” 

    여러 번의 진급 누락은 결국 그가 회사를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한계를 느끼고 평가받는 기준을 깨거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꿈꾸게 된 것이죠. 

    “창업은 처음에 1인기업 아니면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2년 동안 중소기업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그 후 1999년 9월 16일 창업자금 3백만 원을 가지고 창업을 시작했고,  사업장은 집인 21평짜리 아파트였습니다. 당시 창업한 회사명은 ‘준텍’이었습니다. 

    “IMF가 시작되고 벤처 붐이 일어서 초반에는 사업이 잘됐습니다.  그 후 2005년 JBL로 회사명을 바꾸었고, 디스플레이 시장에 위기가  오면서 사업도 내리막을 겪게 됐습니다. PDP 디스플레이에 투자했는데 디스플레이를  LCD로 전향하던 시기였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1월~8월까지 매출이 0원이었는데 직원은 60여 명 가까이 됐습니다.  결국 PDP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띄운 ‘아이빌트’


다시 사업을 일으킨 것은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찾고 만나서 현실화 해주는 엑셀러레이터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시작에는 한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 있었죠.

“일본에 갔다 온 클라이언트가 골프 연습장이 자동화된 기술을 언급했어요.  그때가 한창 박세리 효과로 골프붐이 생길 때였거든요.  특허를 공유하고 3년 동안 생산을 독점하는 조건으로 그분의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실현했습니다.  상용화되어서 아주 성공적인 결과를 맞이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이디어의 가능성과 가치를 알게 됐어요.”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골프장은 그때 이 대표가 개발했던 시스템을 쓸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아이디어 덕을 톡톡히 본 아이빌트의 성공적인 사업은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2017년 엑셀러레이터 법이 만들어졌고 이준배 대표는 최초로 등록한 1호 엑셀러레이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280호까지 있을 정도로 엑셀러레이터라는 직업이 보편화 되고 확대었죠. 

“엑셀러레이터에 대해 설명할 때에 ‘피를 섞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신생기업의 엄마 같은 역할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언도 하고 도움을 주는 거죠. 창립자의 가치관을 보고 투자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신생기업의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며,  함께 성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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