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덕수궁 돌담길이 낭만의 대명사였다면,
요즘의 이 돌담길은 ‘힙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묘의 서쪽 담장을 끼고 이어진 길, 서순라길이 그 주인공.
조용했던 서순라길이 M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글. 김민영
사진. 정우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게 인상적인 동네, 익선동을 조금 벗어나면 요즘 MZ들이 모인다는 서순라길이 나온다. 서순라길은 조선시대 종묘를 순찰하던 순라청 서쪽에 있는 길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종로3가 45-4에서 권농동 26까지를 잇는 곳이다.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1, 3, 5호선 종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출구를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돌담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여기가 서순라길의 메인이다.
요즘이야 젊은 세대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지만, 사실 서순라길은 역사 깊은 동네였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왕조 몰락 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이 일대는 판자촌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이 일대의 주차장, 공장, 사무실 등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찾지 않는 곳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2010년 즈음이다. 종로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주얼리 공예가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동네는 활기를 찾았다. 2020년 서울시는 활기를 찾은 서순라길 재정비 사업을 진행했고, 2~3년 전쯤부터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서순라길의 인기는 요즘이 절정이다. 길을 하나로 두고 한쪽으로는 주얼리 상점, 카페, 맛집들이 즐비해 있고, 한쪽으로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돌담길이 쭉 이어져 있다. 양옆으로 펼쳐진 상반되는 느낌의 풍경들은 새로운 것을 찾는 MZ세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익선동, 인사동, 북촌, 삼청동, 을지로 등 또 다른 서울의 명소와 가까운 것도 한몫했다.
서순라길을 걷다 보면 돌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돌담은 서순라길 포토존이기도 하지만,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순라길 돌담의 시작점과 끝나는 지점에는 ‘종묘 외곽 담장에 새겨진 글자’라는 설명문이 담긴 비석이 있다.
비석의 내용은 종묘 외곽담장에는 수리 시기를 표시한 85개의 지대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76개에는 조선시대의 규례에 따라 간지(干支)로, 9개에는 히로히토의 연호인 쇼와로 수리 연도가 새겨져 있다.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창덕궁~창경궁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지맥을 끊는 도로를 개설해 일대의 원형을 크게 훼손했다. 이와 함께 종묘 담장의 일부를 수리하면서 쇼와로 개축 연도를 새겨 놓았다. 이 새김돌은 우리 역사를 욕되게 한 것과 다름 없는 일제의 잔재이기에 그 설치 내력을 기록해 후대의 경계로 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젊은 세대들이 한 번쯤은 이 돌담에 새겨진 우리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돌담길을 따라 걷는 산책을 마쳤다면, 이제 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보자. 한복 의상실부터 서순라길이 막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리를 잡았던 카페, 식당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걷다가 지치거나 배가 고프면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쉬어가는 것도 서순라길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미다. 워낙에 다채로운 분위기의 카페와 식당들이 많은데 이 모든 곳의 공통점은 ‘돌담뷰’가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 자리가 인기라고 한다. 돌담이 주는 매력이 큰 탓에 상점마다 야외에 테이블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낮에는 햇볕 때문에 빈자리가 대부분이지만, 해가 지고 나면 야외 테이블은 대기를 해야 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서순라길에 먹거리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인 전현무가 서순라길을 돌아보며 타코를 먹고, 캐리커처를 그리는 곳에 들렀던 것처럼 서순라길에는 공예, 문화, 국악 등의 즐길 거리도 많다. 그중 서울주얼리지원센터 ‘스페이스42’에서는 서순라길의 근본과도 같은 각종 주얼리와 관련된 전시를 펼치기도 한다. 한옥 인테리어에 자리한 화려한 주얼리들의 조화가 낯설면서도 새롭다.
단풍이 곱게 물들 올가을에도 사람들이 서순라길을 찾아 저마다의 낭만을 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