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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인문학

우리 시대의 청백리

백인걸은 사화로 얼룩졌던 선조대의 인물로 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호는 휴암(休菴)으로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계 인물들과 교류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지만 스승 조광조와 동문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여러 차례 파면을 당하고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런 시국에 환멸을 느껴 은거하기도 여러 차례여서 벼슬살이는 순탄치 못했는데, 그의 나이 일흔한 살인 명종 22년(1567)에 이르러서야 홍문관 교리(종5품)에 오른다.
[자료 제공 국민권익위원회]

죽음을 무릅쓰고 간신들을 비판한 백인걸

백인걸의 아버지 백익견은 왕자의 사부였을 정도로 학문과 인격이 뛰어났으나 백인걸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기에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나마 살던 집도 연산군이 사냥터를 늘리며 철거당해 셋방을 얻어 살아야 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어머니는 백인걸의 교육에 신경을 쏟았고 그 결과 그는 조광조, 김안국 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백인걸은 어릴 때부터 허자(許磁)와 허물없이 지냈는데 그는 요령이 좋아 권신들과 어울렸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공신까지 된 인물이다. 판이한 성품에도 둘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허자는 백인걸을 걱정하며 재산을 보태 주기도 했다. 을사사화 때 윤원형이 국왕의 밀지라고 주장하며 윤임 등의 대윤 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허자가 백인걸에게 미리 언질을 주며 밀지에 대해 문제 삼지 말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백인걸은 국사를 두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나라 일을 그르칠 수 있느냐며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다음 날 문정왕후가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윤임 및 대신 유관, 유인숙 등을 제거하도록 하였고, 백인걸은 홀로 상소를 올려 이를 비판했다. 그로 인해 문정왕후가 크게 화를 내며 백인걸을 하옥하고 죄를 물었으나 평소 그의 성품을 알던 여러 사람의 비호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혈육보다 중시한 대의

백인걸은 의를 위해서 가족의 사사로운 정을 돌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백인걸의 조카인 백유양의 아들 백수민이 정여립의 형인 정여흥의 사위였기에 모반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고 백유양도 관직에서 물러나 목숨만 부지했다. 하지만 백유양은 작은 아버지인 백인걸의 탄핵을 받아 죽게 되는데,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백인걸은 사사로운 정보다 대의를 중시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핏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성품이 곧았던 탓에 그는 수 차례의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자주 갔고 생활을 꾸려가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공직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녹미를 받지 않아 임금이 특별히 양식을 내려준 경우도 있었다. 그는 항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청렴결백으로 선조대에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백한 성품으로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며 국가의 시급한 과제를 직시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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