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NOVEMBER/ vol.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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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에 위치한 단독주택단지.
평온함이 감도는 이곳에 위치한 정갈한 집에서 정순안 씨는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31년 직장생활 후의 은퇴, 잠시의 공백기를 가진 후 다시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싶다며 집으로 취재진을 초대한 것이죠.
그의 집 곳곳에는 자동차 엔지니어로 31년 이상을 일한 그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담겨 있었습니다.

황정은 / 사진이도영

한 회사에서, 한 직업으로 31년

정순안 씨는 1988년 12월, 대학교를 졸업을 앞두고 한라공조에 입사해 전문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엔진 쿨링 시스템 설계 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은퇴 전까지 같은 분야의 일을 계속 했습니다. 무려 3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말이죠. 자동차 쿨링 시스템 전문가로서 인정받으며 임원으로 중책을 맡은 그는, 회사에 입사한 지 31년 6개월만에 은퇴라는 단어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두렵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고 치열하게 가장의 역할을 해왔으니 이제는 조금 쉬어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죠.

“1988년부터 작년 2020년까지, 3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회사에서 한 업무로 일한 경력도 흔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쿨링 시스템에 관한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실내를 차갑고 뜨겁게 만드는 모든 열 관리에 대한 일을 한 셈이죠. 회사 생활 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보람되고 뿌듯한 일도 많았어요. 해외에 제품을 수출할 때,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 등등 제 역할과 역량이 확장된다고 생각될 때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죠.”

세 딸이 점점 자라고 어느덧 품을 떠나 독립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세월도 실감하게 됐다는 정순안 씨는 어쩌면 그 시간 안에서 자신의 은퇴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그만의 특별한 ‘은퇴 철학’도 갖게 됐죠.

“언젠가 찾아올 은퇴를 미리부터 준비하기 보다는 은퇴 직전까지 현재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어요. 이후의 삶은 이후에 고민하기로 했죠. 실제로 지난해 5월 회사를 나오기 전까지, 저는 회사 내에서 맡은 제 업무에 집중했어요. 그렇게 일하고 회사를 나오니 아쉬움도 있지만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홀가분하더라고요.”

아직 은퇴를 말하기에는, 마음에 가득한 일에 대한 열정

  • 은퇴 후 한 달 만에, 정순안 씨는 동종업계의 한 회사에서 임원으로 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전기차로 바뀌는 자동차 시장 안에서 중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순안 씨는 이를 정중하게 고사했습니다. 31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잠시 쉬었다는 가는 시간을 자신과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어서였죠.

  •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간을 좀 더 잘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이 두렵기도 했지만, 생각을 바꿔서 기대감으로 이 시간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었죠.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하다가 이용 학원을 다녔어요. ‘미용 학원’은 여성의 머리를 다루는 기술을 알려주고 ‘이용 학원’은 남성의 머리를 다루는 기술을 알려주는데 저는 예전부터 이용 기술을 배워보고 싶었어요. 때문에 이때다 싶어 학원에 등록했죠. 6월부터 9월까지 학원에서 기술을 배웠는데 이게 만만치 않더라고요. 정말 어려웠어요. 수업을 듣고 집에 오면 피곤이 확 밀려올 정도였죠.”

  • 이용 학원 수강을 마친 후, 그는 두 번의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후 세 번째에 합격했습니다. 딱 1년 만의 합격이었죠. 이시간 동안 정순안 씨는 이용 시험을 준비하며 동시에 운동도 배우고 그동안 가지 못했던 여행도 가족과 여유롭게 다녔습니다. 삶과 일에 치여 충분히 만끽하지 못한 가족과의 시간을 정성스럽게 보내는데 집중했죠.
    물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은퇴 후 만난 지인의 소개로 고용노동부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소개 받았고, 곧장 중장년일자리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센터를 찾아간 첫 날은 진도를 딱히 못나갔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 안에 뚜렷한 상이 있어야 했는데 저한테는 그게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제 안에서도 명확하게 세워진 기준이 없다보니 당시 컨설턴트께서 일주일 동안 생각을 충분히 한 후 다시 오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서 제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돌아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1주일 만에 제가 원하는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정순안 씨의 속마음을 들은 컨설턴트는 그가 관심분야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적성카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정순안 씨는 의외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가 아직 일에 대한 열정이 크다는 것이었죠. “아직도 현역과 같은 열정이 제 안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은퇴를 맞은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결과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런 저에게 컨설턴트께서 이력서를 미리 준비해보자고 하시더군요. 새로운 회사와 언제 만나더라도 바로 제출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인생 2막, 다시 현역 엔지니어로

이력서를 만들면서 정순안 씨는 지나온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쌓아온 일을 통해 스스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깊이 들여다보았다고 이야기했죠.

“이력서를 쓴지 얼마 안됐을 때, 과거 고객으로 함께 일했던 지인이 함께 일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회사의 비전과 포부를 새롭게 다지는 상황인데 제가 그 여정을 함께 하면 좋겠다면서요. 그 제안에는 관리자가 아닌 실무자로 다시 일해 줄 것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안을 받은 정순안 는 큰 고민 없이 수락했습니다. 일부 주변에서는 임원이 아닌 현역으로 재취업 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정순안 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상담을 받으며 저에 대해 확고히 알게 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큰 고민이 없었어요. 상담을 하면서 ‘그래, 난 아직 일해야 할 때다’ 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은 것 같아요. 때문에 다시 현역으로 입사하는 것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자부심이 있었죠. 실무자로 초대 받았다는 것은 제 실력이 인정받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거죠. 많은 임원들은 실무를 할 줄 모르지만 저는 달라요. 임원으로서의 일도, 실무자로서의 일도 모두 해낼 수 있죠.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여전히 필드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이요.”

현재 정순안 씨는 만족스러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업무를 30년 이상 하고 나니, 모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이 쉽고 덕분에 스트레스도 없다면서 말이죠. 물론 지금의 만족감은 지난 30년간의 숱한 어려움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지금 회사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싶어요. 대표님의 포부와 의지가 제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아요.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인 것 같아요.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주니까요. 저도 이곳에서 함께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이후에 또 만들어지겠죠. 지금은 현재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그는, 은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은퇴 준비를 미리 하느라 현재의 일에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죠. “충실하게 보낸 현재의 시간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시켜줄 거예요. 그러니 자신을 믿고 미래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에 집중하세요.” 수많은 현재의 시간이 모여 미래를 만든다는 진리를 되뇌이며 정순안 씨는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계속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