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월광보합(月光寶盒)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글. 문수림
무명선사는 무림인들이 인정한 지존답게 절도 있게 기초적인 초식만 펼치는데도 위력이 강력한 반면, 백무혈은 공력을 끌어올려 필살의 무공으로 대응했지만 무명선사의 초식을 간발의 차로 피하거나 겨우겨우 맞받아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무명선사의 여래신장이 백무혈을 스쳐 빗겨나갈 때마다 산줄기의 돌무더기를 박살 내는 굉음이 울렸다.
“소승은 더 이상의 살생을 원치 않소. 이미 힘의 차이는 충분히 느꼈을 터, 이쯤에서 투항하여 남은 문파 식구들이라도 죄의 무게를 덜게 해주시오.”
쉴 새 없이 장법을 날리다 말고 백무혈의 바로 코앞에서 주먹을 멈춘 무명선사가 위엄서린 목소리로 투항을 권했다.
“흥! 내가 네 말이나 듣고 그만둘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무림에 발들일 생각을 했겠나?”
이미 내상으로 귀와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지만, 백무혈은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이봐!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 아무리 우리가 주먹다툼을 한다고 해도 주변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을까? 둘러보거라. 너의 자랑인 팔대호원(八代護院)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사대금강(四大金剛)과 십팔나한(十八羅漢)은⑶?”
백무혈이 독기를 씹어뱉듯이 말하자 무명선사는 순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막강한 탓에 그간 호적수가 없어 마음껏 무공을 휘두르지 못하다가 백무혈을 상대로 제어하던 끈을 놓게 되니 금방 심취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 무공에 취해 부하들의 안전을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그를 순식간에 옥죄였다.
“이런! 설마, 네놈! 간사하게 뒤로 사술을 부린 게냐!”
“네놈들이 먼저 우릴 법도와 예의 따위는 쥐뿔도 모르는 사파 마교라고 폄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사술이 다 뭐냐? 그냥 네놈들 밥에 독을 좀 탔을 뿐이야. 소문대로 강한 놈들이면, 목숨은 건지겠지. 뭐, 아무렴 어때? 원래 인생이 그렇지, 안 그런가, 네? 음하하핫!
그나저나 정말 기가 차는군. 정말 내가 네놈이랑 정정당당하게 주먹이나 나눌 거라고 믿었다면, 그건 내 죄가 아니야. 바로 네놈의 죄지. 으하하하핫!”
백무혈이 입을 놀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무명선사가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명선사의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백무혈의 의도된 노림수였다. 잡설과 불쾌한 웃음으로 무명선사의 판단을 흐린 백무혈이 기습적으로 장법을 날렸다.
“흑살마장(黑殺魔掌)!”
백무혈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기운이 강풍을 타고 소낙비가 내리듯이 거칠게 쏟아져 나왔다. 고수 간의 싸움은 간발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법. 상대의 공격을 파훼하기엔 늦은 뒤라 무명선사는 두 주먹을 교차로 들어 올려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흥, 어림없다. 이미 단련하여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된 몸이다. 이딴 장법은 몇 번이고 받아낼 수가 있지.”
“으하하하핫! 누가 몇 번씩이나 날려준다고 하더냐? 이놈아, 넌 이미 내 손바닥 안에 놓였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처음부터 내가 지존을 상대로 이길 생각을 했을라고? 지금까지 두드려 맞았던 건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무명선사가 흑살마장의 기운을 털어내고 다시 여래신장의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백무혈은 무명선사의 뒤로 돌아와 있었다.
“네놈들이 늘 무림의 모든 무공은 그 기본이 소림사에서 시작된 거라고 거들먹거렸지? 그래, 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나도 네 녀석에게 소림의 원천인 불교의 비기를 보여주려는 게야. 받아라, 네놈들 부처가 만든 월광보합(月光寶盒)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⑷!"
무명선사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백무혈이 그의 뒤편 허리춤에 뭔가 둔탁한 각진 덩어리를 꽂았다. 무명선사는 그걸 다시 뽑아내기 위해 갖은 용을 쓰는 동안 백무혈은 주문 외우기를 마치고 그에게서 이미 몇 걸음이나 뒤로 멀어진 뒤였다.
“이,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무명선사의 허리춤에서 자색의 둥근 빛이 넓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게 용을 쓸 때는 떨어질 생각을 않고 꿈쩍도 안 하던 것이 그대로 힘을 잃고 떨어져 허리춤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이, 이, 이런 사특한!”
“워, 워, 네 이놈! 사특하다니! 부처님의 기물이라고 했잖느냐. 내가 네 놈과 맞서기 위해서 먼저 친히 아미파에 다녀왔었다. 소문으로는 밀교에서 압수해 온 장물이 시공간을 넘을 수 있다나 뭐라나? 참말인지, 빈말인지 묘하긴 했지만, 아미파 장문인(掌門人)을 직접 묵사발을 내고 확인한…”
입술을 삐죽하게 올리고 냉소적으로 비꼬는 백무혈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무명선사가 다급하게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눈앞은 망망대해보다도 더 깊은 검은 우주가 펼쳐진 뒤였고, 그가 어둠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다시 넘치도록 환한 빛이 그의 시야, 아니, 온몸을 덮어 감싸버린 뒤였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서류 심사 과정에서 귀하의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내일기업 인사팀 드림
아침부터 날아온 문자에 덕오의 마음은 심란했다.
“알아, 알아. 나도 내가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이 있다는 걸 알아. 단지 아직 기혈이 막혀서 나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이야. 언제가 혈맥이 뚫리면.. 그날이 되면 아우 진짜.. 그나저나 난 왜 또 떨어진 거지?”
아직 혈맥이 뚫리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지원자로써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직무와 요구되는 중요한 이력이나 스킬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원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회사에서 상세하고 구체적인 지원요건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마음이 급한 취준생으로써 일단 지원서를 넣고 보게 되었고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그나마 오늘처럼 불합격 통보라도 주는 경우는 다행이고, 불합격은 통보를 안 해주는 기업도 여럿 있었다.
“혹시 낙하산 합격자를 내정해 놓고 나같은 사람을 들러리로 세우는 건 아닐까? 알 수 없지. 채용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다면.. 역시 나같은 숨은 인재는 채용의 무림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후후 사특한 놈들 같으니…”
자주 보던 무협소설에서 인상 깊게 본 구절을 읊조리며 걸음을 떼었다.
여기서 잠깐!
공정한 채용 문화가 걱정되시나요?
고용노동부는 채용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채용 과정에서 기업이 구직자에게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지원하고, 기업 채용경향조사 확대, 채용·직무 설명회 개최 등을 통해 청년ㆍ기업 간 정보 비대칭도 완화해 나가겠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채용공정성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부정채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제재 사항을 공정채용법에 명문화할 예정입니다.
또한 직무능력에 기반을 둔 공정채용을 위해 채용과정 중 직무와 관련 없는 혼인 또는 임신계획, 자녀유무 등의 개인정보를 수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능력중심 공정채용 상담 제공 및 채용 평가위원 교육 확대 등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청년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수용 가능성을 고려하여 현재의「채용절차법」을 「공정채용법」으로 전면 개정할 계획입니다.
그 순간 덕오의 눈앞에는 기이한 종이비행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종이비행기가 눈송이 사이를 가로지르며 젖지 않은 채 비행하다니.. 정말이다. 지금 이 순간, 기적적인 비행을 선보인 종이비행기가 하나 있었다. 때마침 오후라 눈이 온다고는 해도 하늘만 우중충할 뿐, 밝은 편이었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누구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현대인들이라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길을 걷던 대부분이 종이비행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보단 다들 내리는 눈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바쁜 일상이다 보니 하루하루 무난한 일정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서두르는 게 현대인들의 미덕이니까. 그러니 궂은 날씨는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때문에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비행기가 4~5미터나 우아하게 비행하는 순간은 놓쳤지만, 그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쌓이는 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해 다들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덕오는 그 순간을 ‘보았다’.
함박눈 속에서도 서두르는 여느 사람들처럼 시선을 떨구고 걸음만 서두르지는 않았던 덕이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앞으로 두고, 발걸음에 느긋하게 여유를 묻히고 있었다. 덕분에 종이비행기가 눈에 젖지 않은 채 비행하는 걸 볼 수 있었고, 다음 순간 부메랑처럼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비행 방향을 바꾸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걸음은 신선보다도 태평했지만, 덕오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믿기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탓에 일시적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덕오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취업 실패로 낙담하고 있었다는 걸 새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정말 이상한 건 덕오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종이비행기. 아니, 그 종이비행기의 낙하지점이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었건만, 종이비행기가 비행을 멈추고 착륙한 곳은 길거리 가장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겨자색 반팔 승복 차림의 스님. 그의 손바닥 위였다.
“누.. 누구시죠? ”
당황한 덕오가 물었다.
“나는 무명선사라고 하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오?”
손바닥 위의 종이비행기를 바라보다 오덕오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무명선사가 대답했다.
오덕오는 할 말이 없었다. 무명선사라는 사람이 왜 덕오 앞에 서 있는지, 두 사람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주석
⑴ 여래신장은 소림사가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부처의 손바닥, 즉 확연한 차이로 무지한 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궁극의 기술. 그중 제 일식 불광초현(佛光初現)은 여래신장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초식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부적인 기술명으로, 본 소설이 본격 무협소설은 아니기에 상세한 서술은 이후에도 생략할 예정. 그만큼 독자들 개개인이 각자 재미나게 상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⑵ 혈수마공이나 흑살마장 역시 여기서는 단순히 마교 우두머리의 비기들 중 하나라고만 이해해도 작품 감상에 문제가 없음.
⑶ 방장을 곁에서 호위하는 자들이 팔대호원. 그 외에도 서열 별로 무력 진압에 동원되는 이들이 있음. 여기서는 대략 방장을 호위하던 집단들이 모두 당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작품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음.
⑷ 주성치 주연의 서유기 월광보합, 선리기연의 오마주. 영화에서는 월광보합을 이용해 여러 차례 시공간을 오고 가지만, 정작 손오공의 바람과 달리 연인을 구해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본 소설에서 무명선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