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무림지존, 취업준비생이 되다
3화. 형은 이종격투기 선수가 딱이라니깐?

등장인물

주인공 무명선사

: 구파일방의 태두, 소림사의 방장이자 무림의 지존. 무림의 앞날을 결정짓는 마교와의 대격전 중 적의 사술에 당해 우연찮게 차원을 이동하여 현실 세계 오게 된 무림의 지존. 현실 세계에 도착한 첫날, 오덕오와 만나게 되어 그의 도움으로 현실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
무림으로 회기하길 희망하지만, 당장 마땅히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오덕오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취업에 도전한다.

주인공 오덕오

: 평범한 30대 초반의 취업준비생. 우연찮게 만나 무명대사가 무공이 깊은 무림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무명을 이용해 자신의 막힌 기혈을 뚫을 계획으로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당장 갈 곳이 없는 무명을 이종격투기 선수로 데뷔시키고 자신은 그의 매니저가 되길 희망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덕오의 짝사랑녀 민지아

: 오덕오의 여자 사람 친구.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덕오를 알고 지냈고, 자신을 향한 덕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며 모른 척하고 있다.
취업 문제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찾아온 무명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 오동팔

: 오덕오의 아버지. 오십 대 중반의 남성. 베테랑 보험영업사원이지만, 몇 년 전부터 다이렉트 보험의 대두로 늘 불만을 안은 채 살고 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오늘 하루만 더 버티자.”
덕오가 데려온 무명을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그가 제자들의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라 하고, 속세의 지인들이 전부 각 문파의 수장들이란 이야기를 듣고서는 극진히 대접하게 된다. 의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무명이 고향으로만 돌아가게 되면, 줄줄이 사탕으로 지인들을 죄다 엮어서 계약을 넣겠다는 속셈이다.

어머니 임지현

: 오덕오의 어머니. 각종 아르바이트와 앱테크로 가계를 꾸려나가는 인물. 저성장 시대의 도래나 다이렉트 보험의 시장점유율 같은 것에 따로 위기감이 없다. 그보다는 가족들이 끼니는 제때 챙겨 먹는지, 비 오는 날 우산은 챙겨갔는지가 중요. 그만큼 인간은 기본이 되어야 그다음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
덕오가 데려온 무명의 자립을 돕기 위해 곁에서 적극적으로 잔소리를 퍼붓는다.

3화. 형은 이종격투기 선수가 딱이라니깐?

글. 문수림

이른 새벽.
문밖에서는 임지현 여사가 아침을 차리는 소리로 가득한데, 무명의 귀에는 와서 닿지 않았다.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도, 찌개가 끓어오르는 소리도, 오동팔이 깨어나 내는 소음도, 어느 것 하나 무명에게 가서 닿지 못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전에 손을 모으고 몸 안에 흐르는 기(氣)를 돌리며, 그에 맞춰 호흡을 하는 운기조식(運氣調息). 무명이 무공을 쌓기 시작한 이후로 매일 새벽마다 거르지 않고 행했던 내공심법 수련이었다.
제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무명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바닥에서 떨어지는 듯하더니 허공에 머물기 시작했다.
때마침 임지현 여사의 성화를 못 견딘 오덕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명이 있던 방의 방문을 열었고, 그 순간 무명의 몸이 공중에 떠올라 있는 것을 본 덕오가 놀라서 뒷걸음을 치다가 제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쿵.

그 소란에 집중력을 잃은 무명도 허공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덕오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서는 무명에게 달려들어 빠르게 속삭였다.

“취업은 무슨 얼어 죽을 취업! 형씨. 아니, 무명이 형! 형, UFC 선수해 볼 생각 없어? 형이 한국의 코너 맥그리거가 되는 거야! 어때? 죽이지 않아?”



덕오의 눈은 이미 뒤집어져 있었다. 덕오에게 무명은 알아서 굴러들어 온 황금송아지였다. 무림고수인 무명이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한다면, 챔피언까지는 어렵더라도 어지간한 대회 상금 정도는 씹어 먹고 남을 터였다. 그런 무명 옆에서 매니저로 있을 수만 있어도 덕오는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 될 수 있으리라. 계산이 빛처럼 빠르게 굴러가서 이미 덕오의 두 손이 무명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유…에쁘씨이? 그건 또 뭐요? 제가 이쪽 세계에 대해서는 통 아는 바가 없소. 하나씩 천천히 알려주시오. 맹그리거는 무엇입니까? 일자리 같은 겁니까?”



“아니, 뭐, 나는 형의 컨셉을 존중하니까. 그럼, 천천히 하나씩 알려줄게. UFC는 이종격투기 대회야. 세계에서 주먹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최강의 주먹을 가리는 거지. 근데 내가 봤을 땐 형에게 그게 딱 맞는 직업 같다는 거야! 형이 형 입으로도 그랬잖아. 형이 지존이라며? 주먹으로 당할 자가 없었다며? 게다가 공중에 붕붕 나를 수도 있는데, 체급이 문제겠어? 요리조리 피하다가 급소에만 몇 번 내다 꽂아도 게임 끝나는 거지! 형, 잘 생각해 봐. 이게 세계를 상대로 하는 만큼 상금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흥분한 덕오와 달리 무명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합장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거라면 저와 결이 맞지 않습니다. 무공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정진하고 약자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상대를 제압할 정도로만 무공을 썼어야 했는데, 스스로 흥에 겨워 너무 힘을 휘두른 탓에 이렇게 된 겁니다. 저를 위하시는 뜻에서 하신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번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단단히 흥이 났던 덕오는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무명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에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힘을 꽉 주고 말았다.

“손아귀 힘이 좋으시군요. 덕분에 어깨가 시원해졌습니다.”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비명을 내질렀을 게 분명했지만, 무명은 무림고수답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오는 그대로 놓을 뻔했던 정신줄을 챙기며 무명을 뒤따라 거실로 나갔다.

‘아무렴 어때. 여기는 한국이야. 결국 이것저것 해보다가 UFC 판 굴러가는 거 TV로 보게 되면 생각 바뀌는 건 시간문제지! 아니면, 내가 무명에게 무공을 배워도 되는 거잖아? 그래, 그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

덕오는 임지현 여사의 신신당부에도 불과하고 고용복지플러스센터로 발길을 옮기는 게 아니라 동네 PC방으로 무명을 끌고 들어갔다. 어디 기업으로 바로 취업할 수 있도록 알아봐 주기보단 하루라도 빨리 시작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부터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여기 뭐 하는 곳이오? 다들 저 네모난 상자만 보고 있구려?”



“형, 정말 형의 과도한 컨셉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이젠 감도 오지 않아. 하하, 저거 다 컴퓨터잖아. 뭐, 집에서 폰으로 봐도 되는 거였지만, 형도 같이 보려면 이게 편하니까 온 거야. 그러니까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봐. 여기 컴퓨터로 보면 이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들을 한눈에 알 수 있다고.”



“거, 참 신통방통하구려!”



컴퓨터와 인터넷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무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이 발 아프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정보를 한눈에 열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우주가 흔들릴 만큼의 충격이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기술입니다! 그럼, 이런 걸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을 만나보고 싶소. 아니, 이런 걸 배워두면 내가 소림사로 돌아가서도 우리 문파 식구들의 장래를 위해 좋을 것 같소!”



“뭐, 공학자라면 동네 치킨집만 가도 만날 수 있는 세상인걸요. 그런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당장 끼니 때울 일을 하셔야 하고, 그런 건 기초부터 배우려면 너무 힘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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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괜찮겠네! 태권도 사범. 초보도 된다니 여기 한 번 가봅시다.”



“태권도 사범? 저보고 무술 사범을 해보란 겁니까?”



“기본적으로 무공 연마자이시니까 그 정도는 껌이겠죠?”



덕오는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돌아올 무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를 데리고 태권도 도장으로 갔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아이들에게 기가 빨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반나절 만에 그의 눈이 퀭하게 패어 있을 걸 생각하니 덕오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무명은 덕오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면접을 보러 들어간 지 삼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무명이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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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이렇게 빨라요? 사람 벌써 구했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삼분도 안 걸린다고? 나도 면접을 무수히 봤고 별의 별 중소기업을 다 가봤지만, 기본적으로 오분은 넘게 걸렸는데? 동네 태권도 도장은 커피도 한 잔 내주지 않던가요?”



“그게… 부끄럽지만, 자격 미달이오.”



“네? 자격 미달?”



“관련 경력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운전이 되어야 한다는데, 저는 이 세계의 마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기본 원리조차 모르니 말이오. 운전면허증? 그런 걸 보여 달라는데, 내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소.”

덕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이세계(異世界) 운운하면서도 한국말은 유창하게 하니 어느 정도 컨셉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그냥 돌아 나왔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 없을 수도 있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건 오히려 편견인 거지.’



덕오는 차마 입밖으로 뱉지 못하고 혼잣말을 삼켰다. 운전면허증에 대해서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는데, 무명은 덕오의 상상을 가볍게 넘어서버렸다. 설마 운전면허증이 없었을 줄이야! 아니, 그럼, 제대로 된 신분증이 있긴 한 걸까? 당혹스러워하는 덕오를 보며 무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 여기에서는 배달 업종이 따로 없소? 그건 내가 자신 있으니 배달꾼이 되면 좋을 거 같소.”



“같은 배달의 민족께서 배달꾼이 되고 싶다고 하다니. 이 형은 참, 컨셉을 어디까지 밀고 가려는 건지 내가 정말 감이 안 온다니깐. 일단 그럼 저기부터 가보죠. 배달부야 서로 못 구해서 난리니까.”



면허증도 없다는 양반이 어떻게 배달을 하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지만, 덕오는 우선 무명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도 생각은 있으니 나서려는 게 아닐까? 덕오는 무명을 데리고 동네 배달 전문 중국집을 찾아갔다. 무명은 호기롭게 대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빨리 돌아서 나왔다.

“엥? 이번에도 거절당했어요? 아니, 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다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하더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신속정확하게 배달이 가능하다고, 써달라고, 재차 말했더니 날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로 거절하더군요.”



“뭐라고 하던가요?”



“사람 다리가 빨라봤자, 오도바이? 여튼 그 오도바이보다 빠르겠냐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 오도바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더니 주인장이 갑자기 막 화를 내어서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소.”



덕오는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결국 기합 말고는 정말 가진 게 없었던 것이다. 무명은 사회적 기준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았다.

“그럼, 뭐, 몸을 덜 쓰고 목소리만 맑아도 해볼 만한 일을 해볼까요? 설마 단순히 길거리에서 전단지 나눠주는 데 경력이니 자격증이니 요구하진 않겠죠. 한 번 가봅시다.”



덕오가 풀이 죽은 무명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덕오의 말처럼 경력이나 증명서 따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도착한 임지현 여사가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니, 엄마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라니? 너희 엄마가 어디 너희 아빠만 믿고 살았냐? 집에 사람 입이 하나 더 늘었는데, 앱테크만 해서는 콩나물 하나 더 사기도 팍팍해. 아니, 근데 너네는 일자리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왜 여기로 왔어? 왜? 네 친구 성격에 맞는 마땅한 일이 없든?”



무명은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느끼고 걸음을 반 발짝 뒤로 물렸다. 아니나 다를까, 덕오가 우물쭈물하기 시작했고, 임지현 여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왜 똑바로 말을 못 해? 아침부터 따뜻한 밥 차려주고 내보냈더니 왜 길거리에서 놀고만 있냐고!”



덕오와 무명은 그대로 길거리에서 잔소리를 폭격을 받은 후에야 겨우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제 생각보다 일자리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군요.”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아, 형에겐 그냥 이종격투기가 그래서 딱 안성맞춤이긴 한데… 의와 협을 이루기 위해서 사시는 양반이니까 그러기는 좀 힘들겠고. 아니지, 의와 협을 중시하시는 분께서 방금 전에는 내 등 뒤로 숨긴 왜 숨었어요?”



“아미타불…”



덕오는 섭섭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며 두 손을 휙휙 내저었다.

“아니 뭐, 그만 됐고. 정말 운전면허증이 없어요? 그렇다고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도와줄 친구부터 좀 만나러 가죠.”



“그런데 왜 그렇게 안색이 어두운 것이오? 곤란할 때 도와줄 친구가 있다면 좋은 일 아니오? 아님, 뭐, 소승 때문에 그 친구라는 이에게 신세지는 건 싫은 것이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닙니다. 가보면 압니다.”



덕오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무명이 그저 얄밉기만 했다. 인근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는 덕오가 오랜 시간 마음에 두고 애를 끓인 민지아가 일하고 있었다.
덕오는 지아를 만나기에 괜찮은 옷차림인지, 갈아입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을 왼발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오른발에, 차례대로 싣고서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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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오의 예상대로 지아는 미소 띤 얼굴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마 대기 인원들도 있고, 다른 상담원분들도 있는데, 지아와 마주할 일이 있을까? 아니, 마주할 수 있길 간절하게 바라고, 좋은 핑곗거리를 가지고 나타난 건 맞지만 괜히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어서 난감했다. 덕오는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접수증을 뽑아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걸 뽑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다른 사람들을 보니 그런 것 같소만. 숫자를 보아하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겠소.”



얄밉게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게 돌아가는 무명이었다. 덕오는 괜히 자신의 마음을 무명에게 들킨 것 같아서 심통이 났다. 덕오가 몇 차례 입술을 삐죽이며 못난 소리를 마음속으로 몇 번 읊조리자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번호표는 지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 오랜만이네. 하하. 오늘은 저기, 저, 취업이 어려운 군대 동기 때문에 왔어.”



“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덕오랑 달리 지아는 덕오를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눈앞에 앉은 무명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밝게 웃어 보였다.

“음... 그러니까 소생은 사실 이쪽 세계에서 적응 중이라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떠한 직업들이 있는지 모르겠소. 게다가 여기 세계에서는 자격증이니, 운전면허증이니 같은 것들을 요구하던데 하나같이 다 무슨 말인지 감도 오질 않소.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오.”



“아, 아, 그러니까! 이 친구가 전역한 이후에 바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절로 들어갔었거든. 그래서 적응도 어렵고, 이래저래 준비가 안 된 부분이 많아. 네가 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어.”



덕오는 지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괜히 애꿎은 무명의 등을 쓰다듬으며 둘러대듯이 말을 끼어들었다.

“그럼, 희망하시는 일이나 직업군 같은 건 있으실까요?”



“솔직히 아는 바가 너무 없어서 막연하기만 하오.”



“괜찮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아오시지만, 답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분은 없으세요. 심지어 어떤 정책이 있고, 자신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제가 있는 거니까 천천히 하나씩 같이 알아가도록 하죠.”



지아는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다양한 지원 내용이 적혀 있는 소책자를 펼쳐 보였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적성을 발견하는 거지만, 그전에 참여자격요건부터 맞는지 같이 알아보도록 하죠. 그래야 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도와드릴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저… 저기, 그런데 이 친구가 속세랑 인연 끊었던 몸이잖아. 당장 집도 없고, 부모 형제들 행방도 모르고, 그래도 지원받을 수가 있는 거야?”



지아는 자꾸 대화에 끼어드려는 덕오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그래서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세분화되어 있는 겁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잠시 좀 조용히 해주세요. 우선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여기 서류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그런 다음 선생님에게 맞는 맞춤형 취업지원 서비스를 받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직업 심리검사 같은 걸 해보는 거죠.”



그때부터 무명은 고분고분 지아의 안내대로 성심성의껏 응했고,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나올 때마다 매번 덕오가 옆에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물론 덕오는 그럴 때마다 투덜거림도 잊지 않았다.

“아니, 그냥, 형은 사실 이런 거 해볼 것도 없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딱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지아의 의견은 완전히 달랐다. 적성검사까지 모두 마쳤을 때, 지아는 믿기 어려운 말을 꺼내 모두의 허를 찌르고 말았다.

“친구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죠. 그보다는 무명씨가 직접 작성해 주신 내용을 토대로 검사 결과를 알려드리자면, 이종격투기 선수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먼 거 같아요. 무명씨의 직업 흥미나 특성에 잘 어울리는 직업군으로는 ‘정보통신 연구개발직 및 공학기술직’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이 분야에는 ‘웹 기획자’나 ‘시스템소프트웨어 개발자’ 등의 직업이 있습니다.”



하마터면 덕오는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하며 무명의 정체에 대해 앞뒤 없이 쏟아낼 뻔했다. 역시 그냥 컨셉이었던 걸까? 아니, 무림지존이 웹기획자라니? 어지간한 판타지 소설도 이런 설정은 쓰지 않을 게 분명하다. 반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어찌할 줄 모르는 덕오와 달리 무명은 아주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곧게 허리를 펴고 앉은 상태에서 더 가슴을 끌어당기며 지아를 향해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웹 기획자나 시스템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것이 저 컴퓨터라는 걸 이용하여 일을 하는 직업군이라는 말씀이시죠?”



지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무명의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정말 사람을 찔러버릴 거 같은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지아는 그 강렬함 앞에서 잠시 대답을 멈추고 슬쩍 덕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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