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FEBRUARY/ vol.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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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학생은 학교로, 직장인은 일터로…
우리는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은퇴는 쳇바퀴를 멈춰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굴러가는 쳇바퀴는 방향을 잡는 일이고, 정해진 속도가 아닌 나만의 빠르기로 조절하는 일이죠.
은퇴 이후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유홍석 씨에게서 행복을 배워봅니다.

차은호 / 사진이도영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자화상

청년 유홍석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수산물 가공회사에서 20년간 근속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았죠. 조금 더 부지런히,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독립해 작은 기업을 직접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양대 햄버거 브랜드 프랜차이즈에 새우버거 패티를 만들어 납품했는데, 연매출이 100억 원이 넘을 때도 있었습니다. 단체급식 등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 공장을 늘리고 설비를 확충하면서 사업체가 점점 커졌죠.

“그때는 새벽에 공장으로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어찌나 신이 나던지…….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죠. 우리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사람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 하지만, “잘 나가던” 사업은 햄버거를 정크푸드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와 다양한 먹을거리 문화가 유입되면서 점점 매출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납품을 받던 곳에서는 자체 공정으로 생산할 수 있다며 한순간 거래 중지를 해왔죠. 공장과 설비에 재투자했던 자금은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습니다. 15년간 일궈온 사업체가 문을 닫게 되면서 유홍석 씨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내렸습니다.

  • “완전히 갈 길을 잃어버렸어요.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돈을 잃은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 일이 다 뜻대로 안 되더라고요.”

  • 방황과 좌절의 시간은 1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런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가족과 친구들은 소소한 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통영 한산도에 자리잡고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한적한 바닷가의 시골집을 빌려 살면서 휴식과 산책으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꿈틀거리면서 마음과 정신이 회복되어 갔습니다. 또 다른 친구들이 일자리를 만들어 소일삼아 일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일손이 필요한 곳이면 직종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가서 일했죠.

언 땅에도 새싹은 나고, 봄은 오나니

가족의 묵묵한 응원과 친구들의 잔망스러운 일거리 만들기 덕택에 일상으로 복귀한 유홍석 씨가 한 것은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몸에 밴 부지런함으로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자격증도 따고, 말하기 대회도 나가 입상하고, 혼자서 중국 배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죠. 준비한 자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일까요? 유홍석 씨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은 제주도 입도를 결정했습니다. 좋아하는 한라산과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노사발전재단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시행하는 ‘이음일자리사업’에 지원했는데 4: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도서관 사서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유홍석 씨는 탐라장애인복지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도서를 관리하고, 책을 대여해주고 또 회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대부분이 장애인들이었어요. 일하면서 자기만족도 좋았지만, 몸이 불편한 분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 되었어요.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더 단단해졌습니다.”

사서로 일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이 시작됐습니다.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강수영 소장의 권유로 수기공모전에 응모하고, 제주MBC 토크콘서트에도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들려줄 기회가 찾아왔죠. 또, 장애인단편영화에 출연, 연기라는 것을 해볼 기회도 생겼다고 합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은 가슴 벅차고,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즐기며 하는 일이 모두가 業이 된다

유홍석 씨의 현재 직업은 부산 중구 창선상가번영회 사무국장입니다. 직장생활과 기업경영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 초기 기업들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방법을 함께 찾는 컨설턴트이기도 합니다. “컨설팅을 하다 보면 모두들 ‘답’을 알고 계시 더라고요. 확신을 갖고 싶어 컨설팅을 의뢰하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함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길을 찾아주게 됩니다.” 디카시 - 디카(디지털카메라)와 시(詩)의 합성어로 자신이 디지털카메라로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형상을 포착하고 그 순간을 5줄 이하의 짧은 문자로 표현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며, 유튜브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를 운영하는 유튜버입니다. 혼자 걷기 어려운 노인분들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을 도와 갈맷길을 함께 걷는 갈맷길 길안내 자원봉사자이기도 합니다. 하루 24시간을 쪼개서 사는 바쁜 일상에도 유홍석 씨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현재에 충실하며 행복하고 즐겁게 일 하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은퇴는 의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옷을 입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보세요. 은퇴 이후의 삶을 컨설팅하다 보면 모두들 ‘답’을 알고 계시더라고요. 확신을 갖고 싶어 컨설팅을 의뢰하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라고 권해드립니다. 은퇴는 의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옷을 입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하고 오히려 더 즐겁게 일하고 있는 걸요. 소소한 일상을 시로 기록하기도 하고, 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찍어 유튜브에 방송도 해요. 즐기며 하는 일이 모두가 직업이 될 수 있어요.”

지치고 힘든 시기 유홍식 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인연’이었습니다. 유홍석 씨는 “은퇴 이후 윤택한 생활이 펼쳐진다는 것은 착각이다”라고 말합니다. 은퇴는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현역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은퇴를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죠. 삶을 내려놓고 찾아낸 값진 경험이 유홍식 씨의 말에 묻어 났습니다. 편안한 그의 미소에서 행복을 배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