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온도

나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들

AI GENERATED

얼마 전 모 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새내기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건실한 회사에 다니는 중견 사원이었다.

“저도 언젠가 선생님처럼 전업 작가가 되고 싶어요. 온종일 좋아하는 글만 쓰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냉정하게 말했다.

“직장을 절대 관두지 마세요. 그러면 좋아하는 동화까지 못 쓰게 됩니다.”

나의 소원은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나는 굴곡진 인생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학교에 다니며 공부했지만 허사였다. 의사의 꿈을 가졌으나 장애인은 의대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만 들었다. 결국 인문계로 방향을 바꾸어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은 국문과를 ‘굶는과’라고 자조적으로 불렀다.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뒤늦게 작가의 꿈을 가진 나는 의문을 품었다. 세상이 어떤 곳인데 내가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데 굶는단 말인가. 그렇게 작가의 꿈을 품고 12년간 글을 썼다. 그때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가들이나 주변 선배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들은 직장이 없으니 글만 써서 먹고살아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생각만큼 열심히 쓰지 않는 거였다.

어느 날 밤늦게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차창 밖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시내 건물들엔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저 사람들은 새벽같이 출근해 이 시간까지 일하는데, 나는 그날 동료들과 개똥철학만 늘어놓으며 글쓰기의 어려움만 하소연하고 있었다. 정작 하루 동안 쓴 글자는 한 글자도 없었다. 그래 놓고 작가를 꿈꾼다고 했던 것이다. 몹시 부끄러웠다. 문학이라는 어려운 길을 걷는다며 고민은 했지만, 눈만 뜨면 책상에 붙어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건실한 직장인들을 내 마음속 경쟁자로 삼았다. 저들보다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 눈을 뜨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썼다. 10분, 20분의 자투리 시간만 나도 책을 읽고 메모를 했으며, 쓴 글을 고쳤다. 물론 당장 수익이 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작정 썼다. 낮은 자세로 겸허히 일했다. 그때 나의 소원은 글을 써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지 12년 만에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백수이면서 결혼까지 해 아이 둘을 낳은 상황에서 작가가 된다고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원고 청탁이 쏟아질 리도 없었다. 나의 유일한 살 길은 직장인들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도록 일하는 저들이 나라를 이끌었고 우리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저들에게 얹혀사는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도 아니고, 글을 쓰라고 압박하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업 실적을 올리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글을 쓰는 작업이야말로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가.

나는 이후 눈만 뜨면 글을 쓰고, 책을 쓰고, 원고 고치는 삶을 지금까지 계속해 왔다. 그 성실한 결과는 놀라웠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392권)을 낸 작가가 되었고, 베스트셀러도 간혹 냈으며,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고,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린드그렌상 한국대표 후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투력이 불타오른다. 저들은 여전히 가정을 지키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부를 창출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던가. 저들에게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 한 번 전율하게 만든다. 힘이 솟게 한다.

노동은 소중한 것이다. 노동의 결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가장 고귀하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놀고먹거나 남의 수고와 성취를 폄하하고 갈취하려는 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 후배 작가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긴장 놓지 말고 하루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꾸준히 쓰세요. 전업 작가들 중에도 하루 한두 시간 꾸준히 쓰는 사람 거의 없어요.”

그 말에 후배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왜 소중한지 알겠어요.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

그 후배 작가는 반드시 동화 작가로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소중함을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이다.

글. 동화작가 고정욱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중급 지체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지만,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동청소년 문학계 세계 최고의
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ALMA) 2025년 후보로 선정됐고,
<가방 들어주는 아이>를 비롯해 392권의 책을 펴냈다.

일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