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는 세월을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일해온 경험치가 있기도 하고, 2023년에 출간한 책에서 회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겪은 번아웃에 대해 자세히 쓰기도 해서 ‘쉼과 휴식’을 주제로 하는 강의를 많이 맡게 되었다. 그날도 마침 그런 이유로 청주의 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청주까지 강의 시간을 맞춰 가려면 일찍 퇴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만큼을 벌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도 해야 한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퇴근 전까지 모든 일을 끝내기 위해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고, 청주로 가는 길에도 이런저런 메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도서관에 도착했을 즈음엔 물에 흠뻑 젖은 빨래마냥 몸도 마음도 눅진하게 축 처져 있었다. 도서관 앞에 크게 붙은 오늘 할 내 강의 포스터를 보며 생각했다. 아, 지금 번아웃이라는 강의 주제를 내가 할 주제가 되는가!
하지만 내심 든든하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커피. 무겁고 축축한 눅진눅진한 몸을 녹진녹진 가볍고 생기 나게 되돌려주는 건 카페인이니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고 보니 온종일 커피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 보통은 주최 측에서 강연자용으로 물과 커피는 기본적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나는 담당자이신 사서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마약 중독자가 손을 벌벌 떨면서 ‘코카인··· 코카인···’을 읊조리는 것처럼, 속으로 ‘카페인··· 카페인···’을 애타게 부르며 좀비처럼 강연자 대기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을 했는데! 그랬는데. 커피가, 커피가 없었다. 맞다. 강의를 다니다 보면 매우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커피를 따로 준비하지 않는 곳들도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소심한 성격과 딱히 뚜렷하지 않은 취향의 결과로써 나는 본디 ‘주는 대로 먹자’ 주의자이기 때문에 따로 부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카페인 없이 세 시간 가까이 강의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사서 선생님이 혹시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었을 때 혹시 커피를 부탁드려도 되는지 되물었다. 만약 도서관 안에 믹스커피도 없어서 곤란하다고 하면, 그래서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셔야 한다면,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내가 사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제없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대기실에서 나갔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25분 가까이 지날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10분 후면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아니 이제 커피는 됐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전화를 하려던 참에, 마침내 한 손에 커피를 든 그가 나타났다.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렸냐고 물으면 왠지 추궁처럼 들릴 것 같아서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는데 다행히 그가 곧바로 말해 주었다. 이 근처에 커피가 맛있기로 이름난 카페가 있는데, 어쩐지 (내가) 아주 맛있는 커피를 원할 것 같아서, 왕복 20분을 들여 그곳에서 커피를 사 온 것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감동 받았고, 실제로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오히려 이 커피를 사 오는 데 들였을 그의 20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아주 오래전 회사 직속 상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퇴근 시간도 훌쩍 넘기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 내일 발표할 PPT를 만드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밤 10시가 넘어갈 즈음 회사 근처에서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짐을 가지러 사무실에 들른 상사가 내가 작업하는 걸 보게 되었다. 그때 내 작업물들을 보던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일 네가 발표할 자리는 오직 메시지 전달만 잘하면 되는 자리인데, 그 누구도 PPT 디자인 심사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네가 무슨 색깔을 쓰고 무슨 폰트를 썼는지 아무 관심도 없는데, 왜 이런 데에 몇 시간씩 낭비하고 있냐고. 물론 디자인부터 가독성까지 PPT가 완벽해야 하는 자리도 있겠지. 그럴 때만 최선을 다하면 돼. 그러니까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것부터 파악해. 어디까지가 커.트.라.인.인지. 그리고 딱 그 커트 라인 넘을 정도로만 하는 거야. 무작정 모든 것에 완벽 하려다가는 오래 못 가.
‘쉼과 휴식’을 주제로 강의할 때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최대한 덜 지치면서 일하는지’라고. 우리가 일터에서 힘들고 지치는 크기에 비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휴식의 크기도 커지는데, 수많은 현실적인 여건상 “필요한 만큼의 휴식”을 취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일터에서 덜 소모되면서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는 걸 고민하는 편이 낫다. 이를테면 누군가 ‘나는 커피가 필요하다’라고 했을 때, 맛이나 브랜드 같은 것과 상관없이 단지 카페인이라는 성분만 취하면 되는 건지, ‘커○빈’이나 ‘투○ 플레이스’ 같은 커피 전문점의 커피 정도면 충분한 건지, 실력이 뛰어난 바리스타가 좋은 원두로 내린 하이엔드 커피가 필요한 건지, 따져볼 수 있다면 따져보는 게 좋다는 뜻이다. 내가 1시간이면 끝내고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일에 완벽을 기하느라 몇 배의 시간을 들여 나 자신을 소모시킨 것처럼, 나의 다정한 사서 선생님도 도서관 탕비실에 있는 믹스커피로 5분 만에 나에게 카페인을 건네준 뒤 어쩌면 남은 35분을 다른 할 일에 쓰거나 조금 편히 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매사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커피를 준비하는 게 기쁨인 완벽주의자들도 있겠지만, 번아웃의 가장 좋은 친구는 ‘완벽주의’라는 걸 잊지 말자.
이 일을 겪으면서 조금 더 신경 쓰게 된 부분도 있다. 상대에게 ‘그냥 아무 커피믹스면 된다’, ‘서류 보낼 때 특정 양식에 맞출 필요 전혀 없다’, ‘화질이 안 좋아도 된다’처럼 구체적인 커트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딱 여기까지만 해도 된다고, 그러니까 괜한 노력을 더 하지 말라고, 그렇게 줄인 시간이 고작 몇십 분이라고 해도 부디 좀 쉴 수 있기를, 적어도 덜 소모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