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열정지수

오후 네 시, 사무실은 조용해진다

「워라밸+4.5 프로젝트」 1호 기업 (주)재담미디어의 주 35시간 실험

오후 네 시, 웹툰 스튜디오의 창가가 비어간다. 마감 직전이어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담다’라는 이름의 그릇 안에는, ㈜재담미디어가 콘텐츠와 함께 담아 온 또 하나의 시간이 있다.

글. 차유미 사진. 오충근

마감의 밤을 걷어낸 자리

㈜재담미디어는 웹툰·웹소설 IP를 기획·제작해 국내외 플랫폼에 유통하는 콘텐츠 전문기업이다. 오리지널 IP 개발부터 플랫폼 운영, 글로벌 서비스까지 하나의 가치사슬을 갖췄다. 다만 콘텐츠 산업 특성상 연재 일정과 마감이 하루의 축이 되고, 특정 시기에 업무가 몰리는 구조가 오랫동안 당연시됐다. ㈜재담미디어를 이끄는 황남용 대표는 이 오래된 전제를 다시 들여다봤다.

“좋은 콘텐츠는 오래 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창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 먼저였다. 창작자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곧 지속가능한 경쟁력에 대한 투자라는 것이 그가 근무혁신을 복지가 아닌 투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좋은 콘텐츠는 오래 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창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시간을 줄이는 대신 방식을 바꾸는 법

전환은 한 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주 40시간에서 37.5시간, 다시 35시간으로 단계를 나눠 옮겨갔다. 실무를 설계한 서종휘 경영관리본부장은 그 순서에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웹툰 제작은 작품별 일정과 마감이 워낙 중요합니다. 준비 없이 시간만 줄이면 현장 부담이 커져요. 먼저 37.5시간으로 옮기면서 업무 프로세스를 점검하고 연장근무 원인부터 뜯어봤습니다. 제도가 안정적으로 돌아간다는 확인이 선 뒤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갔죠.”

부서별 공백은 인력 충원만으로 메우지 않았다. 노사발전재단의 ‘일터혁신 상생컨설팅’을 통해 전 직무의 역할과 책임(R&R)을 재정립하고, 반복·중복 업무를 걷어냈다. 그룹웨어로 근태·휴가·전자결재를 표준화했고, 회의 방식과 집중근무시간도 손봤다. 콘텐츠 제작 부서에는 일률적 잣대 대신 작품 일정에 맞춘 자율 운영을 허용했다.

숫자는 방향을 뒷받침했다. 1인 평균 월 연장근로시간은 2023년 49.44시간에서 2026년 28.14시간으로 약 43% 줄었다. 그사이 작품 일정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회의는 꼭 필요한 안건만 남기고 반복 보고를 정돈하니, 구성원들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여지가 생겼습니다. 창의성과 집중력이 자산인 업종에서는 이 변화가 결과의 밀도로 돌아옵니다.”

정책과 현장이 마주 앉은 자리

㈜재담미디어는 2026년 고용노동부 「워라밸+4.5 프로젝트」의 1호 참여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3월부터 주 35시간 근무체계를 본격 시행하면서 정책의 방향과 회사의 실험이 맞물렸다. 근무혁신 우수기업 SS등급, 문화체육관광부 여가친화 우수기업(장관 표창), 가족친화기업, 서울형 강소기업, 하이서울기업 인증도 같은 궤도 위에 놓인다.

제도는 서로 이어져야 힘을 낸다.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부르는 호칭, 자율시차출퇴근제, 1시간 단위 연차가 뼈대를 이루고, 짝수 달마다 열리는 Fun&Joy Day와 장기근속 휴가, 워케이션, 임직원 심리상담, 리더십 교육이 그물처럼 엮인다. 어느 하나가 깜빡여도 다른 제도가 그 자리를 받친다.

노사협의회를 축으로 단계별로 다듬어 온 과정도 정착의 밑돌이 됐다. 서 본부장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얹은 제도는 오래 가지 않는다”고 짚는다. 황 대표가 강조하는 지향도 이와 맞닿아 있다. 재담미디어가 그리는 것은 ‘적게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서 더 몰입하고 더 건강하게 일하는 회사’다.

적게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서 더 몰입하고 더 건강하게
일하는 회사 재담미디어가 그리는 지향은
여기서 시작된다

오후 네 시에 생긴 새로운 고민

퇴근 이후의 풍경도 달라졌다. 운동을 시작한 직원이 늘었고, 가족과 저녁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자주 오간다는 것이 서 본부장이 전하는 소리다. 재미있는 고민도 생겼다.

“이른 시간에 출근한 분들은 오후 네 시면 하루 일을 마칠 수 있는데, 같은 제도를 운영하는 회사가 주변에 많지 않다 보니 ‘같이 시간 보낼 친구가 없어 오히려 심심하다’고 농담하세요. 그러면서 ‘이런 제도가 더 많은 기업으로 번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시더군요.”

회사가 만든 제도라는 감각을 넘어 구성원 스스로 더 나은 방식을 제안하는 흐름이 자리 잡았다는 점이 서 본부장이 꼽는 가장 큰 변화다.

황 대표의 시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재담미디어의 사례가 콘텐츠 산업 전반으로 번져, 더 많은 기업이 일·생활 균형과 생산성을 함께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그의 다음 그림이다.

오후 네 시, 창가가 다시 조용해진다. 그릇에 담기는 것은 이제 콘텐츠만이 아니다. 만드는 사람의 저녁, 이튿날 아침, 그 시간이 돌아와 완성될 다음 작품까지가 나란히 담긴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담다’라는 이름 위에, 오래 창작할 수 있는 사람의 자리가 함께 놓이고 있다.

일터의 열정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