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인터뷰

‘가치를 쉽게 단정하는 세상’에
전하고픈 이야기

배우 구교환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20년째 데뷔하지 못한 영화감독 황동만을 연기한 배우 구교환. 그는 이 배역을 두고 “제 일기장이 유출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열등감과 공허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리. 하경헌 경향신문 기자  사진. 나무엑터스

모두가 그러할 진데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 복지 사업가, 세계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은 시각·청각 장애인으로 알려진 헬렌 켈러. 그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The world is full of suffering but it is also full of people overcoming it)”고 말했다. 이렇듯 살면서 불안과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거로 여겨지고, 불안과 고통을 떨쳐내려는 행위 역시 생명 작동의 행위로 인식된다.

최근 우리가 TV 속 콘텐츠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가장 날 것의 느낌으로 접한 작품이 바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가 아닐까.

<동백꽃 필 무렵>과 <웰컴투 삼달리>로 우리 주변의 인간군상의 갖은 감정을 다룬 차영훈 감독과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등으로 분명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박해영 작가가 만든 작품은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20년째 데뷔 못 한 남자, 황동만

그중 극 중에서 가장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면서도 그 무가치함과 함께 어깨를 걸고 가려 했던 이가 배우 구교환이 연기했던 황동만이었다. 영화 동아리 선후배로 구성된 ‘8인회’에서 20년 동안 데뷔의 영예를 안지 못한 인간, 그럼에도 가장 모임에서 신랄하게 남을 비판하는 인간.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인간미를 지닌 동만의 캐릭터에서 많은 노동자, 직장인들은 위안을 받았다.

“제 일기장이 유출된 기분이었어요.”

배우 구교환도 황동만이라는 배역을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 듯한 동만의 모습 때문에 깜짝 놀랐다는 그는 동만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일기장에 비유했다.

“대본을 읽다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제 일기장이 유출된 기분이었습니다. 대본을 다 읽었을 땐 우리 모두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기분이 들었죠. 동만이 그런 대사를 해요. ‘나는 리트머스지 같은 남자야. 상대가 산성이면 나도 산성! 상대가 알카리면 나도 알카리!’라는 대사가 무의식중에 제가 일상에서 쓰는 말이라 무척 신기하고 놀랐습니다.”

지독하게 보편적인 이야기

구교환은 단순히 드라마를 데뷔 못 한 감독 동만의 성공기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갑갑한 상황을 나름의 악다구니로 풀어내는 방식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섬세한 시선.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 ‘아지트’에서 연기의 미묘한 기운들을 마치 탁구를 하듯 주고받는 분위기에 끌렸다. 모자무싸는 구교환에게 조금 더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였다.

“‘모자무싸’는 아마도 지독하게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진 갖가지 감정을 최대한 극화한 인물이 있을 뿐. 들여다보면 거기엔 나의 모습도 있고, 내 친구의 모습도 있어요. 누구든 그 안에서 ‘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뭔가 고요한 외침이 있는 작품인가 싶으실 수도 있는데, 제가 느낀 모자무싸는 ‘감정 활극’이라고 봅니다.”

열등감과 공허함, 잠깐 멈춰보기

매일 다양한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는 동만의 모습과 같이 연기자라는 직업을 택한 구교환의 일상도 다양한 감정이 일어난다. 이는 때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움트는 열등감과 공허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구교환은 이러한 감정에 휩싸이는 직장인들에게 일단 잠깐 멈춰보는 것을 권한다.

“‘왜 이런 마음이 생겼을까?’를 먼저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남과 비교하거나 어떤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할 때 그런 감정이 커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지금은 작고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도 언젠가의 저를 만드는 시간일 수 있어요. 중요한 건 남의 속도가 아니라 제 속도를 잃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가다 보면 열등감이나 공허함도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균형을 의식하지 않는 배우

구교환은 2008년 영화 <아이들>로 이름을 알린 후 출세작이 된 2021년 넷플릭스 <D.P.>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감정을 전형적인 요령으로 선보이지 않는 그만의 호흡으로 영역을 다져왔다. 그는 MBTI가 감성적이면서 공상이 많은 INFP로 계속 대중에 노출됐는데, 딱히 스스로를 가누는 강박 같은 것은 없었다.

“균형을 찾고자 따로 의식하지 않아요. 자주 말하지만, 제가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죠. 제가 계속 대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대상은 다양합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시간은 계속 저와 가고 있는 거죠.”

이 시대 모든 동만들에게

모자무싸의 촬영장에서 앵글을 조금이라도 세트 바깥으로 넘겨보면 수많은 동만이 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악다구니 속에 감추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동만 같은 이, 박경세(오정세) 같은 이가 있고 그들의 곁에는 이를 조금이라도 보듬어 주려는 변은아(고윤정) 같은 이, 고혜진(강말금) 같은 이가 있다. 구교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안을 딛고 ‘진정한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한창인 <월간 내일>의 독자 그리고 이 시대 모든 동만들에게 극 중 동만의 대사로 메시지를 보냈다.

“동만이 그런 말을 해요. ‘내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 나의 빛나는 스토리를 기대하라’라고요. 좋은 의미든 아니든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르게 무가치해지거나 사라지고는 하는데요. 이 반복 속에서 얻은 생각은 무엇이 가치 있고 아닌지를 너무 쉽게 단정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것이 어느 순간 가치 있게 변신해서 올 때도 있고, 반대로 너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매달리다 보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거든요.”

구교환이 ‘무가치함’ 아니 ‘무가치함과 가치를 쉽게 단정하는 세상’에 전하고픈 이야기는 조금 더 이 상황을 분명하게 바라보라는 메시지였다. 싸우고 버티는 일상보다는 배우고 깨닫는, 바라보면서 생각해내는 일상이 조금 더 가치 있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구교환이라는 배우를 더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버려지는 시대에 배우 구교환은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본다
싸우기보다 바라보는 쪽을,
버티기보다 깨닫는 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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