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의 긴 공백을 견디는 ‘대기배우’라는 말은 결국 ‘대배우’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다림과 인내를 기꺼이 받아들인 한 배우의 성장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하경헌 경향신문 기자
사진. 앤피오, 디즈니+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인기를 얻었던 배우 이시언의 별명은 ‘대배우’였다. 언뜻 보면 ‘대단한 배우’처럼 느껴지는 수식어지만 사실 이 ‘대배우’라는 수식어의 진짜 의미는 ‘대기배우’였다. 이시언이 매번 촬영장에서 많은 장면을 촬영하는 배우가 아니었다가 보니, 장면과 장면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고 이를 견디는 배우였기에 ‘대(기)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사실 배우라는 직업은 찰나의 몇 초 되지 않은 연기를 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직업이다. 자신의 배역을 받을 때까지 대본을 기다려야 하고, 오디션을 봤다면 연출자나 작가, 스태프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촬영장에 가더라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분장이나 복장을 챙겨입기 위해 분장실에서도
기다려야 한다.
이제 스물일곱 살의 배우 신예은은 이 기다림의 미학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배우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다리는 일’을 인내심 있게 견디고 있다. 그가 최근에 출연하는 작품들은 시대극, 사극이 많다. 지금의 시간을 표현하는 현대극과 달리 사극과 시대극은 필수적으로 분장이 따라온다. 그리고
소품과 세트의 역할이 크기에 이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도 있다.
“제가 정말로 시대물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역할이나 인물을 욕심내서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큰 건데, 그 당시에 온 작품이 다 시대극인 경우가 많죠. 이 인물이 이런 느낌이니 이런 시대에 맞춰서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인물의 순간순간 감정에 집중해 연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예은이 최근 공개했던 작품의 결이 다 그랬다. 그는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에서 1982년을 배경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청춘을 보내는 서종희 역을 맡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공개된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 <탁류>에서는 강경(지금의 한강)에서 양갓집 규수지만 장사에 뛰어드는 최은을 연기했다.
“<백번의 추억>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버스 안내양’과 관련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인들을 통해 들었던 작품인데, 종희라는 캐릭터를 보고 그의 진취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죠. 제 모습이 밝아 보일지는 모르지만, 종희를 맡겨주시면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탁류>의 경우는 대본이 술술 읽힌 것도 있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표현할 수 있는 연기의 한계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어요. 주창민 감독님을 뵀는데, 감정과 연기를 잘 끌어내 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배역의 비중은 생각하지 않고 끌림을 받았죠.”
2022년 디즈니플러스 <3인칭 복수>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바로 그해 첫 번째 파트가 공개됐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배우 임지연이 연기한 박연진의 아역을 연기하며 눈길을 끌었다. 오밀조밀 귀엽게 생긴 외모였지만 눈동자에 싸늘한 느낌을 띄워 올리며 주인공 문동은(배우
정지소)을
괴롭힐 때의 미소는 모두를 섬찟하게 했다.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했는데요. 저는 작품을 선택할 때, 제가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인지를 먼저 보는 것 같아요. 해보고 싶은 것보다는 잘하는 것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드는 작품을 선택합니다. 제가 그 배역에 대해 확신을 갖고 깊이 표현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있어야 더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더 글로리>로 유명세를 얻은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작품이 달려왔다. 2023년 SBS 사극 <꽃선비 열애사>의 밝고 꿋꿋한 윤단오 캐릭터, 다시 시대극인 tvN <정년이>에서는 윤정년(배우 김태리)에게 질투를 느끼면서도 국극단의 배우로서 연기의 혼을 불태우는 젊은 배우 허영서를 연기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가 극 중 단 1초 만에 방자의 익살스러운 얼굴로 변신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다.
“예전에 제가 자주 듣던 오해가 웃지 않으면 ‘차가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던 것이었어요. 제가 평소 잘 웃지만, 웃지 않는다면 기분이 안 좋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밝은 인물과 밝은 연기는 행복을 줍니다. 저 역시도 밝은 역할을 하고 싶은데, 제 숙제는 제가 가진 본연의 것,
좋게 봐주시는 면들을 100% 연기로 표현하는 일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어떻게 할까 고민하곤 하죠.”
2016년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입학, 그로부터 2년 후인 2018년 데뷔. 배우 신예은은 연기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 지 10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연극·영화학도 같았다. 인터뷰를 할 때 나오는 모든 말들도 연기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에 집중해 있다. 매일 연기를 배우고 익히고 써먹으며, 연기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골몰하는 학생처럼 그의 하루도 온통 연기로 가득 차 보인다.
그러한 열심과 열정은 데뷔 이후 코로나19로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지만, 매년 한 작품 이상씩은 꾸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촬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대본을 갖고 만족할 만한 연기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친다. 얼굴은 앳되고, 그 모습은 청초할 수 있지만, 그 눈동자 안에
가진 고집은 만만치 않다. 만족할만한 연기가 나올 때까지 인내하고, 스스로를 단련한다.
“보통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생각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참아야 하는 일들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따분하고 시시한 일상이라고 하지만, 저는 스케줄이 없을 때는 대부분 부족했던 잠을 자거나 운동을 하고, 교회에 가거나 연기 레슨을 받으면서
시간을 보내요. 문득 든 생각인데, 사실 꾸준히 하는 영어 공부도, 운동도 사실 크게 흥미가 있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저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한다’ 생각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 참으며 하고 있습니다.(웃음)”
꽤 많은 작품을 하면서 어느 정도 신뢰를 주는 연기자로 성장했지만, 신예은은 스스로 아직 더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그에게는 한 작품 한 작품 주어지는 기회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기회의 소중함 그리고 그 기회를 스스로 이뤄냈을 때의 충만한 기쁨이 그를 움직인다. 이제 어느 정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배움은 끝이 없다. 이를 위해 신예은은 기다리고, 인내하고 노력한다.
“저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바라보자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부정적인 감정에 머무르면 그 감정에 휩쓸릴 것 같아서, 저는 항상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무엇이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늘 객관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실제 어려운 역할을 맡았을 때는 주변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하거나, 비슷한 성격의 인물을 다룬 여러 작품을 참고하기도 해요.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오히려 욕심을 내려놓고 조금 단순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돌이켜보면, 실제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캐릭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제가 스스로 부담과 긴장을 크게 느껴서 그 역할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부분도 있었어요.”
스물일곱의 배우, 그에 앞서 기꺼이 기다리는 일을 즐기면서 자신을 다지는 한 명의 아티스트. 지금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배우 신예은의 연기는 그의 그런 길고 지루할 수 있는 노력을 통해 꽃을 피웠다. ‘대기배우’가 실제 ‘대배우’가 안 될 리도 없다. 2026년 새해의 힘찬 걸음이 필요한 지금. 신예은은
자신의 좋은 기운을 <월간 내일> 독자들에게도 전한다.
“지난해 많은 작품을 통해 캐릭터를 선보여드렸는데요. 이들을 모두 사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월간 내일>을 통해 뵙게 된 소중한 시간들을 잊지 않고,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새해를 맞아 여러분의 삶에 웃음이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나날만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