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제철한끼
한 그릇에 피어난 가을
백 가지 꽃처럼 어우러지는
‘백화반’
가을이 깊어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유난히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생각난다. 화려한 음식도 좋지만, 갓 지은 밥에서 피어 오르는 구수한 김과 그 위에 소복이 올려진 갖가지 나물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글과 레시피. 김희은 셰프
일러스트. 냉무
글과 레시피를 보낸 김희은 셰프는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소울’을 이끄는 오너 셰프로,
일상적인 식재료와 장 문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비빔밥에는 꽃 같은 이름도 있다. 밥 위에 재료가 꽃처럼 피어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화반(花飯), 백 가지 꽃이 어우러진 듯 풍성하다는 백화반(百花飯)이다. 서로 다른 빛깔과 향, 식감이 한 그릇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다가도 비벼지는 순간 전혀 새로운 맛이 된다. 나는 이 이름을 참 좋아한다.
백화반에는 오색 나물 대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정취를 담는다. 따뜻하게 지은 흰쌀밥 위에 식감이 매력적인 말린 묵, 들깨가루에 고소하게 볶은 무나물, 쌉싸름한 더덕생채, 담백한 숙주나물과 곱게 채 썬 밤을 올린다. 가을 향을 머금은 송이버섯채와 감칠맛을 더할 반건조 생선까지 곁들이면 한층 풍성해진다. 비슷한 색이어도 들여다보면 표정이 다르다. 특히 무나물은 담백한 재료들 사이에서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이어준다. 색을 덜어내니 향과 식감이 오히려 또렷하다. 순백의 한복을 입은 듯한 이 그릇에는 백간장과 채수, 청양고추를 더한 양념장으로 끝맛을 개운하게 맺는다.
비빔밥만큼 너그러운 음식도 드물다. 꼭 들어가야 할 재료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 하나가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재료들이 조금씩 제 맛을 내어줄 때 가장 맛있는 한 그릇이 된다. 셰프로서 수많은 재료를 다루다 보면 좋은 요리가 귀한 재료나 복잡한 과정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익숙한 재료도 어떻게 손질하고 어떤 맛과 잇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그래서 먼저 각각의 맛을 살려주는 일이 중요하다. 백화반은 내가 좋아하는 요리 방식과 닮았다.
마지막 순간의 재미도 있다. 가지런히 담아놓고 결국 모두 비벼 버린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만, 나는 그 순간이 가장 좋다. 각자의 맛이 밥알 사이사이에 스며들며 비로소 하나의 음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는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계절이 바뀌면 담기는 재료가 달라지고, 함께 먹는 사람이 달라지면 추억도 달라진다. 올가을에는 밥을 넉넉히 짓고, 가장 맛있는 재료를 하나씩 꺼내 백화반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백화반
계량 1 큰술 = 15g, 1 작은술 = 5g, 1 컵 = 250mL
재료
잘 지은 흰밥
주재료 말린 올방개묵, 무나물, 숙주나물, 굴비, 더덕채, 밤채, 참송이버섯채
백간장 양념 채수 5큰술, 백간장 1큰술, 간 배 1큰술, 들기름 1큰술
이렇게 만들어요!
(솥밥) 철원 오대쌀을 이용해 고슬고슬하게 밥을 잘 짓는다.
말린 올방개묵은 채 썰어 소금, 참기름으로 밑간한다.
무는 얇게 채 썰어 들기름에 살짝 볶다가 채수를 부어가며 잘 익히고, 다진 마늘 소량, 들깨가루, 소금으로 간을 한다.
숙주나물은 깨끗하게 손질한 후 끓는 물에 삶았다가 물기를 제거하고 소금과 참기름으로 가볍게 간을 한다.
굴비나 서대와 같은 동해안의 말린 생선은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둔다.
더덕은 얇게 채 썰어 소금, 참기름으로 가볍게 간을 한다.
생밤은 곱게 채 썰고, 참송이버섯은 실처럼 가느다랗게 손으로 얇게 찢어 준비한다.
(플레이팅) 중앙에 잘 지은 오대쌀밥을 담고 주재료의 찬들을 올리고, 가운데 곱게 찢어 둔 참송이버섯채를 소복하게 올린 후 양념장을 곁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