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우주소녀로 데뷔해 배우로 성장한 김지연(보나).
그녀에게 ‘신중함’은 망설임이 아닌 꾸준함의 다른 이름이다.
선택에는 조심스럽지만, 결정 후에는 우직하게 나아간다.
글. 하경헌 경향신문 기자
사진.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SBS
‘신중하다’는 말은 국어사전에서의 의미로 ‘매우 조심스럽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해나가며 자신과 주변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판단하고 천천히 일을 해나간다는 의미로 보인다. 하지만 그룹 우주소녀의 멤버로 배우로도 거듭나고 있는 김지연(보나)에게 이 ‘신중’의 의미는 약간 다르다. 조심스럽되, 그 결정에
있어서는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의지를 상징한다.
2016년 2월 우주소녀로 데뷔한 김지연은 바로 이듬해 KBS2 드라마 ‘최고의 한방’으로 배우로서의 경력도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비교적 조연의 역할로 출연했던 2017년 두 작품, 2018년 두 작품을 제외하면 그는 꼬박꼬박 1년에 한 작품씩을 소화했다는 점이다.
2021년 막을 내린 KBS2 ‘오! 삼광빌라’를 시작으로 2022년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2023년 MBC ‘조선변호사’, 2024년 티빙의 ‘피라미드 게임’에 이어 올해는 SBS 드라마 ‘귀궁’에 출연했다. 섭외가 많다고 해서 거침없이 몸을 내맡기는 스타일도, 그렇다고 작품을 쉬는 모습도
아니다. 신중하게 골랐다면 우직하게 밀고 간다.
“지금까지 세어보니 10년 동안 드라마를 9개 했더라고요. 그 사이에 가수로서 앨범도 10개를 냈습니다. 안 쉬고 열심히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데뷔 당시에는 20대 초반이라, 지금 나이와 비슷한 30대가 되면 어른이 돼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여전한 것 같아요.(웃음)”
그는 최근 SBS의 드라마 ‘귀궁’을 마쳤다. ‘귀궁’은 우리나라의 전통 설화를 배경으로 악신인 이무기가 빙의한 도령과 무녀 사이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김지연은 이 작품에서 여리 역을 연기했다. 그에게는 ‘조선변호사’ 이후 두 번째로 도전하는 사극연기였고, 무속신앙을 소재로 하고 무녀로 등장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지금까지는 현실적인 설정과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만일에 그가 나라면’이라는 생각으로 대입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했죠. 그런데 원래 판타지를 좋아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저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 빼고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을 내려고 노력했어요.”
‘무녀’라는 직업은 지금도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뿐더러, 모습이나 행동양식을 재현하기도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일단 무녀를 하겠다고 신중한 검토 끝에 결정했다면, 김지연에게는 우직하게 달려가는 일만이 남았다. 그는 무녀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전문가들을 만나고 각고의 노력을 했다.
“완전한 무녀의 모습은 아니지만, 애초에 판타지적으로 갈 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일단 저희 드라마에는 무속을 알려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거든요. 이분들에게 여러 자문을 받았어요. 특히 일종의 주문이라고 불리는 ‘독경’이 힘들었는데, 평소에 안 쓰는 말이라 잘 안 외워졌어요. 어쩔
수 없이 두세 달 동안 냉장고에도 붙여놓고, 침대나 TV 심지어는 핸드폰에도 받아놓고 시간이 될 때마다 외웠어요.”
중간에 여리가 굿을 하는 장면은 두 달 동안 한국무용을 미리 배워두고 응용했다. 이렇게 준비를 했지만, 막상 촬영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화덕차사’라 불리는 신이 빙의하는 장면도 있었는데요. 저는 누군가가 빙의해 들어온 연기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해 큰 숙제 같은 시간이었어요. 여리의 몸에 목소리는 남자니까요. 한이 맺힌 귀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결국 진정성 있게 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죠. 결국 목소리 자체보다는 그
감정에서 납득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이렇게 김지연이 큰 도전이든 작은 도전이든 새롭게 일을 하는데도 갖은 노력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속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 편이다. 자신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이것이 설사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해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싫어한다. 정의와 신뢰를 가장 큰 가치에 두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떳떳한 자신을 좋아한다.
“어떤 자리에서도 마음에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듣기 좋은 말만 하기보단, 한 말에는 책임을 지고 싶어요. 거짓말도 피하고 싶고요. 말이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걸 보며, 한마디라도 신중히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드라마 10편, 음반 10장은 많은 수지만, 1년에 여러 작품을 소화하는 이들에 비하면 오히려 규칙적인 편이다. 그 속에도 김지연의 신중함은 담겨 있다. 배우나 가수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려 한다. 그런 균형감으로 10년 가까운 연예계 생활을 묵묵히 이어왔다.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한계를 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귀궁’도 잘 해내고 싶었고요. 체력이나 마음이 힘들어도, 신중히 쌓아온 선택들이 결과로 이어질 때 큰 보람을 느껴요. 지금도 한 작품 한 작품 소중히 쌓아간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김지연이 이번 작품을 하면서 느낀 점은 ‘장르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장르가 다 어울리고,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 사실 지금까지 김지연의 배역은 실제 있을 법한 사람이 실제 일어날 법한 일에 빠져드는 역할이었다. 청춘의 열정과 충동을 대변했던 ‘란제리 소녀시대’의 이정희, 철이
없고 잘 당하긴 하지만 사랑스러웠던 ‘오! 삼광빌라’의 이해든, 도도하고 묵묵한 성격의 펜싱선수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고유림, 나라를 위해 복수에 나서는 ‘조선변호사’의 이연주, 서열로 인해 피라미드를 만드는 학교의 부조리를 깨려 했던 ‘피라미드 게임’의 성수지 등이 모두 그랬다.
“고유림을 기점으로는 제 모습과 닮은 캐릭터를 찾으려 했어요. 연기는 제 안에서 꺼내 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귀궁’을 계기로, 나와 달라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 딱 그런 변화의 시기인 것 같아요. 새로운 느낌을 보여드리는 것이 앞으로 제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안에서 캐릭터를 꺼내는 일도 신중함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 행보의 한계를 알고 새롭게 방향을 트는 것 또한 신중함의 산물이다. 이렇게 김지연은 10년을 아이돌 연기자라는 화려함 속에서 자신을 다져왔다. 그가 보여줄 신중함의 산물은 또 어떤 것이 될까. 우리는 또 그의 연기를 보며 얼마나 기쁠 수
있을까. 김지연의 신중함은 그의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믿음’의 다른 이름이 됐다.
“월간 내일 독자 여러분, ‘귀궁’ 재밌게 보셨을까요? 그동안 많은 사랑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에너지를 받으셨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여러분 가까이에서 웃음과 감동을 모두 드릴 수 있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