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버님은 평생 농사를 지으시며 살았다.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도 농사꾼이셨다. 내가 어머님의 배 속에 있을 때도 어머님은 쉬지 않고 농사일을 하셨다. 어머님의 뱃속에서 겨울을, 봄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이 세상에 나왔다. 달이 훤하게 뜬 밤이었다. 가을이었으니까 바빴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방에 재워놓고 들일을 나가셨다. 나는 혼자 울다 자다 깨어 지치고 배고파 또 울었을 것이다. 어머님이 들에서 돌아오시면 젖을 먹고, 밤이면 어머님은 나를 곁에 두고 감을 깎고, 겨울이면 삼을 삼았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농사일 속에서 자랐다. 내가 걸을 수 있을 때 나는 스스로 마을 앞 징검다리를 건널 줄 알았고, 학교 가기 전부터 부모님의 자잘한 농사일을 거들었다. 학교 갔다 오면 나는 감자를 씻어 놓고, 보리쌀을 갈아놓고, 강에 가서 다슬기를 잡아다 놓았고, 집 안 청소를 다 해 놓고, 잠에서 깨어 우는 동생을 업고 부모님이 일하는 곳으로 젖을 먹이러 다녔다.
어머님이 동생 젖을 먹이는 동안 나는 벼를 베고, 보리를 베고, 콩밭을 매고, 아버님이 따다 떨어뜨린 감을 줍고 알밤을 주웠다. 고학년이 되면서 모내기할 때 못줄을 잡아 주고, 술주전자를 날랐고, 샘에서 일하면서 먹을 물을 길어 왔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나는 집에서 감자를 삶아 지게에 지고 들로 나갔다. 겨울이면 동무들과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고. 방학이 되면 방학 동안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소를 돌보고 돼지 밥을 주고 닭을 키웠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모내기 철이면 농사일을 돕기 위해 며칠 동안의 농번기 방학을 주었다. 어떤 때는 며칠 동안 비를 맞으며 모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다. 여름이면 논에 들어 풀을 뽑았고, 가을이 되어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벼를 베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 학교 선생이 된 나는 일요일과 방학이 되면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농약을 해야 하고, 보릴 베야 하고, 벼와 보리를 지게에 짊어져 날랐다. 내 몸은 뼛속까지 농사 노동자였다.
농사는 자연과 인간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노동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같이 일을 했다. 같이 일을 하다 보면 같이 먹었고, 같이 먹다 보니, 같이 놀았다. 같이 먹고 일하면서 놀던 그 농촌 마을의 노동을 우리는 농촌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공동체라는 사회적인 말은 그렇게 작은 농촌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자연이 시키는 대로 자연의 순환을 따랐다. 곡식은 그들의 몸과 마음에서 자란 자식이었다.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던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았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마을 공동체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사람들과 마음을 맞추며 살았다. 농사는 공부였다. 배우면 배운 대로 써먹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잘 따랐다. 농사가 곧 예술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평생 옆에 두고 하는 말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 였다. 사람으로서 도리와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이웃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었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착하고 고운 마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가. 마을 사람들은 또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는다고 했다. 놀라운 말이다, 모든 일을 하매 있어서 나와 다른 저 사람과 그리고 나와 세상일과 어긋나지 않게 서로 마음을 모으는 일이야말로 모든 노동의 기본이고 그것이 삶의 기초였다.
같이 먹고 일하면서 노는 공동체는 나라가 있어야 하는 근본정신이다. 이 세 가지 일 중에서 하나가 허물어질 때 나라의 근본 질서가 흔들리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고달프고 힘들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을 지키는 일이 곧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같이 먹고 일하면서 노’는 일을 개개인 스스로 선택하여 가꾸고 나라가 노동의 가치를 보장하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