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신

일하는 시간도
내가 정할 수 있다면

세계가 주목하는 ‘노동시간 주권’

오전 10시, 누군가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 후 여유롭게 업무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집중력이 가장 높은 늦은 밤에 몰입해 성과를 낸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노동이 ‘9 to 6’라는 틀에 개인을 맞추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의 노동은 개인의 생애 주기와 업무 효율에 맞게 시간을 재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글. 차유미  자료. ‌weeklyseoul 외

노동시간의 저축과 인출,
독일의 ‘근로시간 계좌제’

독일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제도는 근로시간 계좌제(Arbeitszeitkonto)다. 계약된 근로시간보다 더 많이 일한 시간을 은행 계좌처럼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휴가나 근로시간 단축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프로젝트가 몰리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해 시간을 쌓아두고, 자녀 양육이나 자기계발이 필요한 시기에 꺼내 쓴다. 쌓아둔 시간이 많다면 조기 퇴직도 가능하다. 기업 입장에서도 업무량 변화에 따라 인력을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어 노사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실제로 전체 기업의 44%, 250인 이상 사업장의 약 81%, 500인 이상 대기업의 경우 89%가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을 만큼 독일 사회에 깊이 자리 잡았다.

거절할 수 없는 권리,
네덜란드의 ‘근로시간조정법’

네덜란드는 2000년에 근로시간조정법을 도입해 세계 최초로 유연근무를 법제화한 나라 중 하나다. 10인 이상 사업장에서 6개월 이상 근무한 근로자라면 누구나 근로시간의 단축이나 연장을 요청할 수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입증 책임의 전환’에 있다. 고용주가 요청을 거절하려면 ‘중대한 경영상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을 법적으로 입증해야 하며, 단순히 관행이나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드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덕분에 근로자들은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신의 상황에 맞는 근무 형태를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게 되었고, 네덜란드는 삶의 질과 생산성을 함께 높인 유연근무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입사 첫날부터 당당하게,
영국의 ‘유연근무 청구권’ 강화

영국은 2024년 4월부터 유연근무 청구권(Flexible Working Rights)을 한층 강화했다. 기존에는 26주 이상 재직해야 청구권이 생겼지만, 이제는 입사 첫날부터(Day One Right) 유연근무를 요구할 수 있게 법이 개정되었다. 영국의 근로자는 이제 연간 2회까지 근무 시간, 장소(재택근무), 근무 방식(압축 근무 등)의 변경을 요청할 수 있다. 특히 고용주는 근로자의 요청을 거절하기 전 반드시 대면 상담 등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거절 사유 역시 법이 정한 범주 내에서만 가능하다. 영국 정부는 이를 통해 노동 시장 참여율을 높이고, 특히 간병이나 육아 책임이 있는 근로자의 경력 단절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시간의 자율성이 곧 생산성이다

세계 여러 나라가 노동시간 주권을 법적 권리로 보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의 집중력과 창의성은 고정된 틀 안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잘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하고, 생애 주기의 흐름에 따라 노동의 강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주권은 고용주의 무조건적인 수용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절 사유를 법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협의를 의무화한 것은, 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기업에서 근로자에게로 조금씩 이동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간 주권’은 이제 복지의 차원을 넘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지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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