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인터뷰

들꽃처럼 피어난 예술과 삶의 기록
우리는 노동자 가족입니다

서은혜·조영남·장차현실·서동일

투박한 빗자루질이 섬세한 붓질이 되고, 외로운 기록이 연대의 노래가 되는 곳. 경기도 양평의 언덕 위에서 ‘노동’이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다운 기적을 일구어가는 서은혜 작가와 그 가족을 만났다.

정리. 차유미  사진. 오충근

노동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랑의 공동체’

초록의 물결이 굽이치는 양평의 한 언덕, 이곳에는 매일 아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이 펼쳐진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다큐멘터리 <니얼굴>로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던 서은혜 작가의 일터이자, 35명의 발달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일구어낸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다. 소외된 이들의 삶을 묵묵히 카메라에 담아온 서동일 감독, 장애인 자립을 위해 스스로 투사가 된 만화가 장차현실 작가, 그리고 아내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동료 화가 조영남 작가까지. 이들은 스스로를 거침없이 ‘노동자 가족’이라 부른다. 장애라는 그림자를 노동이라는 빛으로 지워낸 이들의 이야기는, 숨 가쁜 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함께 일한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먼지 털던 손으로 세상을 그리다

우리는 화려한 조명 아래 선 배우 정은혜를 기억하지만, 사실 그녀가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흘린 땀방울은 훨씬 더 치열했다. 23살, 낯선 세상이 두렵기만 했던 은혜 씨의 첫 사회생활은 복지관의 1년 계약직 공공근로였다. 당시 그녀가 맡았던 일은 붓을 잡는 일이 아닌, 복지관 구석구석을 닦는 청소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빗자루를 들고 먼지를 쓸어내며, 그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몫을 해내는 법을 몸소 익혔다.

비록 누군가는 보잘것없다 여겼을지 모를 그 1년의 청소 노동은, 은혜 씨의 삶에 단단한 근육을 만들어주었다. 그 끈기가 밑거름이 되어 문호리 리버마켓의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5천명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었고, 오늘날 당당히 급여를 받으며 창작에 몰두하는 ‘예술 노동자’의 삶을 가능케 했다. 먼지를 털어내던 그 투박한 손은 이제 세상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그림을 그리는 손이 되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개인이 홀로 사회에 맞추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사회가 먼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넉넉히 품을 수 있도록 변화해 나가야 합니다

기록하는 아버지와 벽을 허무는 어머니

이 가족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수단이 아니다. 아버지 서동일 감독에게 노동은 ‘기록’이다. 해직교사, 소외된 농부 등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담아온 그의 카메라는, 이제 딸 은혜 씨와 동료들의 ‘예술 노동’을 비춘다. 그는 딸이 캔버스 앞에서 부르튼 손으로 선을 긋는 과정을 보며, 그것이 세상 그 어떤 노동보다 치열하고 숭고함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는 딸을 위해 ‘투사’가 된 만화가다. 그녀는 장애를 가진 자녀가 부모 없이도 당당히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노동’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뇌수술이라는 큰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녀가 아트센터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가고 없어도 은혜가 노동자로 대우받으며 노년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노동은 딸의 생존이자, 장애인이 세상과 맺는 가장 건강한 관계의 끈이다.

그림으로 맺은 필연, 함께 걷는 다정한 동료이자 부부

아트센터에는 가족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다. 은혜 씨의 남편이자, 그 역시 발달장애를 가진 아트센터 소속 작가로 활동 중인 조영남 씨다. 두 사람은 그림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료이자 부부다. 영남 씨는 센터 내 카페를 운영하며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노동과, 자신의 캔버스를 채워가는 예술적 노동을 병행하며 삶의 주권을 직접 행사하고 있다.

최근 두 사람은 ‘부부전’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시선이 담긴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을 지우고, 오직 ‘일하는 예술가’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다. 영남 씨의 든든한 존재감은 은혜 씨뿐만 아니라 아트센터의 모든 동료에게도 커다란 희망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은혜와 동료들이 치열하게 선을 긋고 색을 채우는 과정을 보며 다시금 깨닫습니다. 노동은 존재의 가장 고귀한 증명이라는 것을요.”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인 서동일 감독의 이 말은 곧 이들 가족이 세상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이 가족이 꿈꾸는 미래는 아트센터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일하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어우러지는 ‘행복한 빌리지’는, 이제 양평의 작은 마을을 넘어 우리가 사는 도시로, 그리고 이 나라 전체로 번져나가기를 소망한다.

이미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는 35명의 예술가가 함께 꿈꾸는 마을이 되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주체로 탈바꿈하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이 노동이 되고, 노동이 삶의 구원이 되는 이 건강한 파동이 세상 끝까지 닿기를. 서은혜 작가와 그 가족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땀 흘리며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약속을 건넨다. “우리는 노동자 가족입니다. 우리가 일구는 이 작은 마을이 일터가 되고, 그 일터가 다시 나라가 되어, 마침내 일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거대한 기적의 지도가 완성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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