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한 기업 강연에서 관리자 한 분이 털어놓은 고민이 기억에 남는다. 신입 직원에게 일을 맡겼더니 “이걸 왜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던 자신의 신입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인가 싶어 서운했다는 그에게, 나는 오히려 이런 사건들이 좋은 신호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 질문을 ‘도전’으로 받아들일지 ‘신호’로 받아들일지에 따라 조직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은 온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다. 해당 질문의 날카롭고 방어적이라면 반동의 언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은 반항이나 반동이 아니라, 일의 목적을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배운 세대의 작업 방식의 산물에 가깝다. 목적지를 알고 운전하는 사람과 모르고 운전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왜 하는지 아는 사람은 상황이 바뀌었을 때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사소한 변수 앞에서도 멈춰 서서 다시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실제로 그 관리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일의 배경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는데, 몇 달 뒤 그 신입이 팀에서 가장 믿음직한 직원이 되었다며 웃었다. “왜요?”라는 물음은 무례가 아니라, 잘하고 싶다는 뜻의 다른 표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세대 간 소통의 기술을 거창한 데서 찾지 않는다. 딱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설명하는 성의’다. 일을 맡길 때 배경과 목적을 한두 문장이라도 붙여 주는 것이다. “이 자료는 다음 주 경영 회의에 올라가는 거라, 숫자 검증이 특히 중요합니다.” 이 한 문장을 붙이는 데는 십 초면 충분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일의 우선순위와 힘을 쏟을 지점이 선명해진다. 짧은 설명이 지시를 납득으로 바꾸고, 납득한 사람은 시킨 것 이상을 해낸다. 설명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일터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투자다.
다른 하나는 ‘묻는 용기’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궁금한 것을 묵히지 않고 묻는 것이다. 질문했다가 부족해 보일까 봐, 혹은 바쁜 선배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 혼자 끙끙대다 마감 직전에 문제가 터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일터에서 진짜 위험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삼십 분이면 풀렸을 문제가 사흘을 묵히면 사고가 된다. 그러니 질문을 미루지 않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 이전에 팀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이 용기는 혼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반기는 선배, “그건 좋은 질문이네요”라고 받아 주는 상사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질문이 환영받는 조직에서는 실수가 일찍 드러나고, 질문이 눈치 보이는 조직에서는 실수가 조용히 자란다. 묻는 용기와 설명하는 성의는 이렇게 서로를 키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탠다면, 피드백은 사람이 아니라 일에 대해서만 하자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말과 “꼰대들은”으로 시작하는 말은 모두 일이 아니라 사람을 겨냥한다. 그 순간 대화는 소통이 아니라 전선이 되고, 고칠 수 있는 문제가 고칠 수 없는 감정으로 번진다. “이 보고서의 이 부분은 근거가 더 필요하다”는 말은 사람을 키우지만, “너희 세대는 끈기가 없다”는 말은 사람을 닫게 만든다. 일에 대한 지적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존재에 대한 단정은 받아들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대라는 큰 이름표를 떼고 나면, 결국 같은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두 사람이 남는다.
오늘도 묻기를 망설이다 용기를 낸 분들, 바쁜 와중에 한 줄이라도 설명을 보탠 분들께 응원을 전하고 싶다. 소통의 기술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 실체는 이런 작은 성의들의 반복이다. 대단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없어도,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 하나와 설명한 줄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그 성의들이 쌓여 일터의 온도를 만들고, 그 온도가 결국 일의 결과를 만든다. 함께 일을 잘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를 일하기 좋은 동료로 만들어 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