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인터뷰

기초가 튼튼해야 계단을 오른다
‘직관의 승부사’ 신진서

세계바둑 랭킹 1위 신진서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
영화 <승부>의 이 한마디는 바둑이라는 고전 게임이 우리 삶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많은 경우의 수 속에서 단 한 수를 직관적으로 두는 바둑은 산업 현장과도 닮은 점이 많다.
바둑판 위의 승부처럼, 삶과 일터에서도 ‘기초’와 ‘직관’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가치다.

글·사진. 엄민용 MHN스포츠 편집국장

바둑,
답 없는 질문을 마주하는 게임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승부>는 한국이 오랫동안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 밀려 ‘변방국’으로 대접받던 한국 바둑을 세계의 중심에 앉혀 놓은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가 벌이는 반상 대결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다.

가로·세로 19줄이 만드는 361개 교차점에 흑돌과 백돌을 놓아 누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지로 승패를 겨루는 바둑은 흔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게임’이라고 말한다. 상대의 돌을 많이 잡거나 자신의 영역을 넓힌 사람이 승리하는 경기 방식 때문에 ‘인류 최고의 전략 게임’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들 표현보다 더 널리 통하는 말이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실제로 한 판의 바둑을 승리하려면 ‘포석’을 잘 짜야 하고, 시의적절하게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자충수’와 ‘무리수’로 위기를 맞지만, ‘묘수’로 기사회생하기도 한다. ‘꼼수’가 횡재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꼼수를 부리다 망한다. 이렇듯 바둑을 두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꽤 닮았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둑이다’라는 표현에서 바둑을 ‘인생’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리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다 보니 ‘포석’이나 ‘묘수’뿐 아니라 ‘정석’ ‘패착’ ‘초읽기’ ‘끝내기’ 등 숱한 바둑 용어가 생활언어로도 쓰인다. 윤태호 작가의 인기 웹툰이자 배우 임시완의 연기가 돋보였던 드라마 <미생>의 ‘미생’ 역시 바둑 용어다. 미생은 “대마(뭉쳐 있는 여러 개의 돌)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말로,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유하기에 이만한 단어도 없다. 이처럼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점에서 바둑으로 근로 현장의 여러 상황을 비유할 수도 있다. 근로 현장이 곧 삶의 현장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바둑판의 얘기는 곧
산업 현장의 얘기

영화 <승부>에는 “기초가 없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다. 기초 없는 성취는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표현 역시 근로 현장의 속련공들에게 적용해도 썩 어울린다. “전부인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벗어나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는 대사도 업무 현장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들려줄 만한 조언으로 부족함이 없다.

현재 바둑 세계랭킹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진서의 말도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프로기사들의 수(手)는 비슷하다. 승부는 아주 작은 차이에서 판가름난다. 상대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간절함이 조금이라도 더 강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그의 말에서 ‘프로기사’를 ‘기업’이나 ‘기술자’로, ‘승부’를 ‘성공’으로 바꿔 읽으면 바둑판의 얘기는 곧 산업 현장의 얘기가 된다.

실제로 신진서는 바둑계와 인공지능(AI)의 관계가 산업 현장에 그대로 투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류를 향한 AI의 급습’을 피부로 실감케 한 사건 중 하나가 인류 대표 이세돌이 바둑 AI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일이다. 당시 국내 바둑계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바둑 전문가들 대부분은 “체스 세계 챔피언이 슈퍼컴퓨터에 진 점을 감안하면 바둑도 AI에게 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소보다 많을 정도로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창조력을 지닌 인간의 두뇌로만 그 깊은 수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럴 듯한 이유였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세계 1인자로 불리던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1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세돌이 거둔 1승마저도 그의 수법이 아주 완벽해서 거둔 것이 아니라, 너무 터무니없는 수에 알파고가 버그(오작동)를 일으킨 때문이라는 것이 금방 밝혀졌다. 그렇게 인류 최고의 바둑기사가 AI와의 대결에서 완패하자 ‘이제 바둑계는 끝났다’는 소리가 바둑계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기계한테도 지는 바둑에 사람은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예측은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진 이후 바둑의 영역은 더 넓어지고 바둑의 수법은 더욱 깊어졌다. 한국·중국·일본·대만 등 전통적 바둑 강국에서는 바둑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그동안 불모지에 가깝던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바둑 동호인이 생겨났다. 바둑 대회도 더 많아졌다. 현재 AI는 바둑계를 덮친 먹구름이 아니라 바둑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이끈 활력소가 되고 있다.

직관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장 공부’가 필수다. 기초가 없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 나를 발전시키는 묘수

신진서도 처음에는 AI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기계가 인간의 미세하고 미묘한 감각들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둑에는 ‘두터움’이나 ‘승부 호흡’ 같은, 어떤 수치로 정량화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아 AI의 기계적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다고 신진서는 얘기했다.

그러나 이제 신진서는 “AI는 나를 더욱 채찍질하고 열심히 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AI 때문에 바둑이 더 재미있어졌다”고도 전한다. ‘AI와 대결하는 대신 AI의 장점을 찾은 것’이 그의 인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AI가 추천하는 수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 나의 상상과 계산을 더해 나만의 수를 찾아 발전시키려 한다”는 게 신진서의 AI 활용법이다.

신진서는 바둑뿐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도 자신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얘기했다. AI가 인간의 일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돕고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노동이나 산업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자기 말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신진서는 “바둑계에서 오랫동안 ‘상대가 깜짝 놀라 귀가 벌겋게 될 만큼 기막히게 좋은 수’라는 의미에서 ‘이적(耳赤)의 수’로 불리던 과거의 묘수들 중에 AI가 등장한 이후 ‘별무신통(別無神通)한 수’로 평가받는 게 적지 않다”며 “그런 수로는 이제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산업 현장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정확한 통계나 근거 없이 그냥 내려오는 관행들은 이제 AI가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바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신진서는 지적했다. 이는 AI가 몰고 온 재앙이 아니라 AI가 가져다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직관력은 훈련의 산물

신진서는 바둑판에서의 대결과 산업 현장에서의 근로가 지닌 공통점으로 ‘직관’의 중요성을 꼽기도 했다. 바둑은 수많은 정석(바둑에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격과 수비에서 최선이라고 인정받은 수법)과 기보(바둑을 둔 내용의 기록)를 외우고 있어야 유리하기에 얼핏 ‘기억력의 싸움’으로 보일 만하다. ‘바둑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둑은 ‘지금까지 전 인류가 둔 바둑 중에서 똑같은 판은 없다’고 단정지을 만큼 경우의 수가 많은 데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경기다. 게다가 ‘빠름’을 추구하는 현대 흐름에 밀려 바둑 한 수 한 수를 두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 두어진 수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고 이리저리 계산을 할 시간이 없다. 그랬다가는 ‘시간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한 판의 바둑을 두면서 상당 부분을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신진서는 말한다. 분석이나 추리를 할 시간이 절대 부족해 바둑돌들이 얽힌 모양이나 상대의 자세 등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착점을 한다는 것이다.

신진서는 이런 직관력을 키우는 자신만의 비법으로는 ‘끊임없는 훈련’을 꼽았다. 대국이 없는 날에도 남들의 기보를 분석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등을 마치 실전처럼 반복해 머릿속에 그려 본다는 것이다. 감각은 타고나는 면도 있지만, 훈련에 의해 얼마든지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 신진서의 판단이다. 특히 신진서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학습 등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장인들도 대부분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숙련된 유경험자일 뿐이다. 근로 현장에서의 직관력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앞선 사람들의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고, 벌어지지 않았지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그려 보는 노력이 있어야 직관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신진서의 조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현장 공부’가 필수다. 기초가 없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진서는 누구?

200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모님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후 천재성을 보이다가 2012년 영재바둑입단대회를 통해 프로에 입문했다. 이후 3년 만에 국내 정상급 바둑기사로 발돋움하고, 입단 6년 만에 국내 1인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 2월 난양배에서 우승하는 등 그동안 세계대회에서 8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세계 1인자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