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을 쉬었다. 꿈은 멀어졌고, 세상과도 멀어졌다.
다시 아침에 눈을 뜨고, 단장을 하고, 걷고, 일터로 향하게 된 건 우연 같지만 단단한 선택이었다.
김보라 씨는 말한다. “밥값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이에요.”
글. 차유미
사진. 김규남
김보라 씨는 요즘 매일 아침이 설렌다. 눈을 뜨고, 회사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 평범한 일상이 더없이 소중하다. 출근길에 햇살을 맞으며 걷는 그 순간, ‘나도 이제 남들처럼 밥값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 때면 마음이 꽉 찬다. 직접 번 돈으로 연차를 쓰고, 여행을 계획하고, 점심값을 계산할 수
있는 삶. 그녀는 그 일상을 ‘행복’이라 부른다.
이토록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누리기까지, 그녀는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신촌 거리를 거닐던 스무 살의 그녀는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고시 낙방은 꿈과 현실 사이의 깊은 간극을 만들었고, 대학 졸업 후 그녀의 삶은
‘고시 준비생’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었다. 점점 자신을 잃어갔고, 결국 “그냥 쉰다”고 대답하는 청년이 되었다.
자신이 무언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불안, 어디에도 쓸모없다고 느끼는 무력감은 깊은 어둠처럼 그녀를 잠식했다. 고시공부를 포기한 뒤에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머리를 식히는 중”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그 말조차 믿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30대 중반이 되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김보라 씨는 그간 흘려보낸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짐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겠다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일단 내일배움카드부터 만들어야지.’
단순한 생각으로 찾은 성남고용복지플러스센터는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막연하게 자격증 하나 따야겠다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상담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혹시 도약보장패키지 해보실래요?”
그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그녀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상담사 선생님과 마주 앉게 되었고, 첫 면담에서 현실적인 진단이 이어졌다.
“현재 나이와 경력을 고려하면 일반 사기업이나 서비스직 입사는 쉽지 않을 수 있어요.”
냉정한 평가였다. 하지만 김보라 씨는 상처받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시원해졌다. 누군가가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짚어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이후 상담사는 그녀에게 직업심리검사를 권했고, 결과는 ‘사회형(S)과 관습형(C)’. 고객 응대에 능하고, 체계적인 조직 내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분석이었다. 고시 준비만 해오며 진로를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던 그녀에게 이 결과는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이력서를 써보자.”
그때부터 상담사와 함께 하나씩 준비가 시작되었다. 과거의 알바 경험, 짧은 교육 수료 이력, 남들에겐 시시해 보일 수 있는 이력들도 놓치지 않고 정리해갔다. 컴퓨터활용능력 2급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고, 주 1~2회 꾸준히 면담하며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해갔다.
어느 날, 성남에 위치한 잡월드 청소년체험관에서 정규직 사원 모집 공고가 떴다. 상담사는 말했다.
“보라 님, 이건 해볼 만해요. 지금까지 준비한 걸 잘 녹이면 가능성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김보라 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불합격하던 이력서였고, 자랑할 만한 경력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담사는 방향을 잡아주었다.
“기업이 보고 싶은 건 학력보다 조직 적응력, 실무 역량이에요. 아르바이트 경험도 그 안에 녹여낼 수 있어요.”
상담사는 그녀의 백화점 데스크 경험, 과외 경험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끌어냈다. 어떤 고객을 응대했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정리해 면접 준비까지 도와주었다.
그리고 면접을 앞둔 마지막 날, 상담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대로 너무 좋아요. 보라 님은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에요. 편안하게 하세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면접장에 들어섰다. 결과는 ‘합격’. 몇 년 만에 받은 첫 정규직 제안이었다. 출근 첫날, 상담사는 “응원할게요. 언제나 어디서든.”이라는 문자를 보내주었다. 작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컥했다.
지금 그녀는 잡월드에서 청소년들에게 직업 체험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 방문한 아이들의 눈망울, 낯선 공간에서 질문을 던지는 용기, 체험을 마친 뒤의 반짝임까지. 그녀는 말한다.
“아이들이 제 설명을 듣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꿈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어요.”
체험관을 나가며 “선생님, 저 이런 일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아이의 뒷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한참이나 따뜻하게 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빛이 되듯, 누군가도 예전에 그녀에게 그랬다.
지금 김보라 씨는 다시 꿈을 꾼다. 65세까지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것이 목표다. 상담사가 알려준 ‘만다라트’ 계획표를 따라 자격증 준비도 계속하고 있다. 사회복지사, 직업상담사, CS리더스 관리사 자격증이 그녀의 목표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처럼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요. 당신도 빛날 수 있어요.”
그녀는 아직도 구직자 도약보장패키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단지 20대 초반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자신처럼 30대 중반에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육아와 경력 단절을 겪은 여성,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중장년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끔 직장 동료들이 묻는다. “어떻게 이 회사에 오셨어요?”
그럴 때 그녀는 웃으며 대답한다.
“구직자 도약보장패키지 덕분이에요.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어른’을 만나 길을 알게된 김보라 씨는 이제 , 자신의 빛으로 누군가에게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하고,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의 도약을 돕는 삶. 그녀는, 단단하고 따뜻한 빛을 품은 사람이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개인별 맞춤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용노동부의 정책사업. 진로설계, 직업훈련, 일경험, 취업알선 등 단계별 서비스를 통해 안정적인 일자리 진입을 지원한다. 고용24(www.work24.go.kr) 또는 가까운 고용센터에서 신청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