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배우 오정세는 매번 다른 얼굴, 다른 눈빛,
다른 결로 관객을 설득해왔다.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는 그의 폭넓은 연기는
단순한 변신을 넘어, 세상과 배역을 잇는 탁월한 ‘협상’의 과정이었다.
글. 하경헌 경향신문 기자
사진. 프레인TPC, SLL, 스튜디오앤뉴, 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
배우 오정세가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을 종이에라도 인쇄해 죽 늘어놓고 보면, 새삼스럽게 이 배우의 대단한 공력을 확인할 수 있다. 매번 다양한 장르의 작품 속에서 더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한다. 게다가 비슷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물을 표현하는 눈빛과 표정은 또 다르다. 모두가 오정세의 연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은 배역을 다루는 그의 ‘넓이’와 ‘깊이’ 때문이다. 지난 2019년에서 2020년 초를 예로 들자면, 그는 당시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과 영화 <극한직업>,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연이어 등장했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안경사로 외로움을 타면서도 소심하지만 사고는 다치는 노규태 그리고 <극한직업>에서는 조직폭력배의 보스 테드 창을 연기했다. 그리고 <스토브리그>에서는 단장 역 남궁민과 대립하는 구단주 권경민 역을 연기했다. 이 모습이 휴먼 코미디, 액션 코미디, 스포츠 드라마로 장르도 다 다른 데다 비슷한 시기 한 인물이 연기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결국 이러한 성과는 그가 탁월한 눈으로 자신의 배역을 잘 지켜보기도 하지만, 그 배역과 세상을 잇는 다리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섬세하게 세상에 그의 배역을 설득해 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다른 말로 연기로 자신의 캐릭터를 풀어내는 탁월한 ‘협상가’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또 다른 배역 민주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JTBC에서 지난 7월 막을 내린 드라마 <굿보이>에서 민주영 역을 맡았다. 낮에는 세관의 평범한 공무원이지만 밤이 되면 세관으로서 용인한 밀수범죄의 수익으로 극의 배경이 되는 인성시의 지하경제를 주무르는 거대한 악이 된다. 이
반전이 있는 인물, 다른 누가 하면 어색할 수 있으나 대중을 치열하게 설득해내는 오정세가 있다면 배역은 협상력을 갖는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은퇴한 운동선수가 한 팀으로 나와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어요. 이 선수 출신들로 이뤄진 ‘굿보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컸죠. 결국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에 서 있는 민주영이 그만큼 나쁘게 그려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16부로 드라마가 꽤 길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지루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가장 평범한 인물에서 한 꺼풀 한 꺼풀을 벗겨낼 때 나오는 민낯. 그걸로 민주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선과 악이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한 배역. 다른 누구라면 이 표현이 쉽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오정세는 이전의 경험이 있었다. 그는 2023년 방송된 드라마 <악귀>의 염해상 역을 가장 표현하기 어려웠고 자신의 정서와 먼 인물로 꼽는다. 민속학자지만 어려서부터 귀신을 보는 능력에 어머니의 자살과 할머니의
탐욕을 경험했기에 말투와 행동, 성격까지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당시 염해상은 글(대본)로만 봤을 때는 어려웠거든요. 김은희 작가님을 믿고 저만의 방식으로 염해상을 만나려고 노력했죠. 악귀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자주 다른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부분을 주목했어요. 그는 주변에 보이는 것을 놓치고 가는 사람이 아니구나.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누군가를 추모하는 모습을 많이 넣으면서 배역을 만들어갔습니다.”
연기를 세상과 배역이 만나는 수단이고, 배우는 이를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이 협상의 과정은 단지 배역과 세상이 만나는 가교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배우는 늘 상대 배우가 있고, 배우들의 사이에서 연기한다. 또 다른 감정의 결을 가진 배우와의 호흡도 오정세에게는 많은 인상을 남겼다.
“<굿보이>의 경우에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려운 장면도 많았는데, 박보검 씨를 보면서 이를 즐기는 모습을 봤습니다. 매회 촬영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안 풀리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도 저의 몫인데요. 저는 그런 부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부분을 실천하는 보검 씨를 보면서
인상을 받았어요. 어느 날 굉장히 추운 날씨에서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저는 10초 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보검 씨는 이미 물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런 즐기는 마음을 보면서 진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오정세는 끊임없이 많은 협상의 과정에 선다. 이는 배역을 표현하며 관객을 설득하는 과정도 있고, 배우로서 상대 배우를 설득하는 과정도 있지만, 배역을 결정하면서 나오는 설득의 과정도 있다. 오정세는 그런 과정에서 특히 다작을 하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쓰임새가 있다면
지금의 입지에서도 단역도 피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늘 많은 작품에 나오는 것 같고, 그 작품에서의 존재감 때문에 늘 일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 고민은 10년 전, 15년 전에도 했던 것 같아요. 한국 영화를 찍기 시작할 시기인 2006년? 정도 때의 생각이었는데요. 역할의 크기는 적지만 숫자는 많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드는 생각은 좋은 작품이 있다면, 손을 내밀어주시면 잡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계속 잡아 오다 보니 지금이 된 것
같아요.”
그의 협상력은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번 손을 잡고, 때로는 그 과정에서 상처도 입지만 전체적인 경향을 긍정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에게 결국 ‘좋은 관계에서 오는 균형’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으로, 스스로의 신념과 느낌을 믿는 과정에서 받은 좋은 기억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갈의 걱정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매해 새로운 고민과 걱정, 자극을 받는데 결국 작품과 함께 성장하는 것 같아요. <악귀> 당시에도 어려운 숙제였고, 다른 작품도 그랬지만 매번 접근하는 방법은 달랐던 것 같아요. 제 것을 꺼내기도 하고, 방금 가져온 어떤 원재료를 녹이고요.
자극을
받고 이를 표현하기도 하죠. 작업이 안 돼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제 몫인 것 같고요. 이를 해나가면서 얻는 행복과 즐거움이 있기에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작품이 그런 마음으로 계속되면 좋겠고요.”
1997년 영화 <아버지>로 경력을 시작했고 연극이면 연극,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을 다졌던 그는 2010년 영화 <부당거래>에서의 악역 기자, 2012년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에서의 주연 발탁으로 주목받았다. <타짜:신의 손> 이광태 배역은 그 당시 많은
관객들의 뇌리에 남는 배역이 됐다. 이렇게 연기를 시작한 지 30년이 다 돼 가지만 그는 아직도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 생각보다 그를 알아보는 시선도 많지 않아, 편한 부분도 있다.
“최근에도 집에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마스크도 안 쓰고 다녔어요. 그런데 한 분도 알아보시지 않던데요?(웃음) 제 인지도가 없다기보다는 요즘 문화가 다들 자신의 할 일을 하시느라 알아보지 않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감정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많이 듣는 것 같아요. 깊이는 없지만 좋아하는 곡이
많아서 한 곡이 꽂히면 찾아봅니다. 최근에는 김필선이라는 인디 뮤지션의 곡이 좋아 공연도 다녀왔어요.”
하지만 오정세는 일상과 촬영 현장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 연기가 인생 자체였고 인생이 또 연기였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례는 2020년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상태 역에서 드러났다. 발달장애가 있는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발달장애 첼리스트를 만나 조심스럽게 그의 일상에 접근했고
나중에는 그 친구와 함께 극 중 의상을 입고 놀이공원을 누볐던 일화가 공개되는 등 진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는 어떤 현장이 늘 인상적이었고, 특이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 작품과 매 장면에 온 마음을 쏟았다.
“여러 연기를 하면서 긍정적인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요. 물론 제 밑바탕에 있는 거죠. 제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가지는 사고이기도 해요. 긍정적으로 스위치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늘 연기를 하는 이유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선한 사람이
결국에는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이거든요. 그런 영향력이 언젠가 미치지 못하는 때가 오겠지만, 그런 시기가 오지 않거나 최대한 늦게 오도록 노력해야겠죠.”
오정세가 늘 연기를 할 때마다 듣는 ‘신(Scene)스틸러’라는 찬사는 결국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심(心)스틸러’도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에게 배역에 대해 설득하고, 함께 연기하는 사람도 그 스태프도 설득한다. 결국 그 연기의 결과물을 갖고 작품을 보는 관객과 대중을 설득한다. 이렇게 배우는
탁월한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 오정세는 그런 의미에서 30년째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의 이러한 협상력에는 늘 사람과 연기에 진지한 진심이 담겼으며, 이 울림이 30년째 여전한 울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그의 계속된 물음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저는 그냥 고민을 많이 하는 배우인 것 같아요. 작은 역할이든 큰 역할이든, 이 인물은 왜 이럴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표정은 어떨까….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다 드러나진 않지만, 그런 고민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가 살아나는 것 같아서 그런 고민을 멈출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 고민과 함께 어떤 작품이 올지 모른다는 설렘으로 작품에 임하고 싶습니다.”
오정세는 <월간 내일> 독자들에게도 ‘결실의 계절’ 가을을 앞둔 시기에 인사를 건넸다.
“제가 나왔던 <굿보이> 어떻게 봐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노력하며 작품을 준비했고요. 스스로에게는 수고했다는 말을, 응원을 해주고 싶습니다.
정의만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 수 어렵겠지만, 저는 그래도 많은 정의가 악을 이기길 바랍니다. 그게 드라마 안에서도 현실에서도 가능했으면 합니다. <월간 내일> 독자 여러분도 이렇게 많은 소망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내일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