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온도

내가 먼저 웃어야
세상이 나를 비춘다

형과 남동생은 공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형과 동생은 한 번씩 직장을 옮겼고, 줄곧 성실하게 대기업에 다닌다. 반면에 나는 직장을 몇 군데를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직장을 많이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내게 받은 명함이 10개가 넘는다고 했으니 할 말이 없다.
파스칼은 말했다.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라고. 그런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나는 열처리 공장에도 다녔고, 호텔 웨이터와 인쇄소 영업부 사원을 거친 후 안정된 직업을 찾기로 다짐했다. 몇 가지 원칙은 있었다. 첫째,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직업. 소설가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둘째, 소설가가 되더라도 전업 작가로는 살지 않겠다는 것. 선후배들이 작가가 되면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보았으나 어떤 직장을 들어가더라도 정년을 채우겠다고 결심했다.

선배의 소개로 신문사 출판부의 임시 사원으로 입사한 것이 우연의 시작이었다. 월간지와 신문사 기자로 직업을 바꾸는 사이 여전히 갈증은 남아 있었다. 형과 동생은 대기업에 다니며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데, 둘째 아들인 나는 수가 틀리면 직장을 때려치웠다. 나의 장벽은 학벌이었다. 전문대 문창과 출신인 나는 어느 날 4년제 대학 국문과 출신의 여성 후배보다 연봉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정을 요구했으나 사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 직장을 옮겼다.

나의 존재 의미를 직장에서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세상이 나를 비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명언을 되새겼다. 낮에는 기사를 쓰거나 편집일을 해야 했지만, 이동 중에는 시간을 아껴 책을 읽었고, 밤에나 주말에는 미친 듯이 책을 읽거나 소설을 썼다. 매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다.

첫해에는 1편, 두 번째 해에는 2편, 세 번째 해에는 3편, 네 번째 해에는 4편, 다섯 번째 해에는 5편, 여섯 번째 해에는 4편을 보냈는데 마지막 해에 당선 통지를 받았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고, 세상에 복수를 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신작 장편소설을 발간했다. 등단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내 이름을 달고 5번째 책이 나왔으니 과작인 셈이다. 나를 포함하여 직장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이번 소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는 각별하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소설을 써오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쓰는 게 즐거운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소설을 쉽고 재미있게 좀 쓰라는 것. 하여 이번에는 편하게 썼다. 제목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는 세상과 관계가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먼저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인간들은 누구나 어두운 거울 앞에 서게 된다. 16년 전의 나는 소설보다 회사 일에 미쳐 있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는 일도 드물었다. 가족은 서로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나는 오래도록 가족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게 한때 조카였던 아이의 파양이 결정되고 우리 가족과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나는 본가 옥상에 올라가 울었다. 떠나갈 아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고, 지치고 쇠약해진 형과 형수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인간의 관계와 삶과 운명이 노력과 의지로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 밤하늘에는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2년 전, 대형 출판사에 다니던 나는 인사 발령이 난 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성실하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1인 출판사를 차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생각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는 말을.


신승철 소설가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으며, 기자와 출판기획자로 활동했다. 경희사이버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했다. 소설집으로 <태양컴퍼스>, <낙서, 음화 그리고 비총>과 장편소설로 <아담의 첫 번째 아내>,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에서는 세상이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그리고 타인과 나를 대하는 정직한 시선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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