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네 해를 살면서 이십 년 가까이 잡지사에서 일했다. 공연, 영화, 음식, 패션······ 이런저런 잡지사를 텀벙텀벙 옮겨 다니며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마감 기간이면 저마다 얼굴이 누렇게 뜬 동료들과 형광등 아래 둘러앉아 맵고 짠 배달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매달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와 씨름하며 낯선 촉감의 샅바를 그러쥐었다. 번번이 모래밭에 나동그라지면서도 나는 행복했다. 행복하다고 믿었다. 월세랑 카드값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월급도, 이따금 밖에서 겪는 수치와 모멸도 다 괜찮았다.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오랜 꿈이었으니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시대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쁨. 글쓰기라는 한 줌 재능을 살려 밥 벌어 먹고산다는 자부. 그것이 자빠진 나를 매번 일으켜 세웠다.
그런 나의 열심과는 무관하게, 직장 생활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퇴직금은 들어오지 않았고 대표는 잠적했다. 비슷한 패턴을 네 번 연속 겪고 나니 헛웃음이 났다. 사람들은 잡지가 사양 산업이라 그렇다고들 했다. 마치 내가 겪은 일이 마땅한 내 선택의 결과라는 듯이. 나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떼인 돈을 받아내려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는 대신, 밀린 돈의 절반만 받고 물러나길 택했다. 악몽을 꾸었다는 듯 체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다음 직장으로, 또 다음 마감으로 넘어갔다. 동료들과 노무사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싸울 시간에 기사 한 줄 더 쓰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믿었다.
마흔을 앞두고 다니던 직장이 또 망했다. 역시나 퇴직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언젠가 한번 써보고 싶었던 소설을 한 편 썼다. 평생 쓸 운을 ‘몰빵’이라도 한 건지, 그게 덜컥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당선 발표 이튿날, 평소 흠모하던 출판사 두 곳에서 출간 제의가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출간 계약서에 사인하며 다짐했다.
그래, 이제부터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거야. 도비 이즈 프리!
그러나 도비의 자유에는 대가가 따랐다. 일단 들어오는 일의 성격부터가 그랬다. 조직에 몸담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공을 들여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일, 아무 보람 없이 정신만 갉아먹는 일. 그처럼 ‘짜치는’ 일이야말로 콘텐츠로 생계를 이어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몫이었다. 나를 들볶던 상사가 사라진 대신 세상 모든 사람이 상사가 되었다. 클라이언트도 상사, 그 밑의 직원도 상사, 보수를 입금해 주는 재무팀 직원도 상사. 졸지에 상사 부자가 된 나는 사방팔방 굽실거리기 바빴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정수리에 새치가 수북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곱절로 늙은 노예 요정 도비가 거기 서 있었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한 외주 업체의 요청으로 인터뷰했던 인플루언서가 그 일을 발주한 원청을 고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자신의 인터뷰 영상을 동의 없이 광고에 썼다는 이유였다. 명백한 원청의 과실이었으나, 외주 업체는 원청에 항의하는 대신 소속 없는 내게 몽땅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순간, 날카로운 인식 하나가 나를 베고 지나갔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구나. 각자도생하는 이 세계에서 나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뿐이구나. 나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원청 변호사와 법원에 동행해 달라는 그의 간곡한 요청도 단칼에 거절했다. 일 년 넘게 주 수입원이었던 일을 그만두고, 차일피일 밀리던 고료도 남김없이 받아냈다.
“그동안 제가 알던 분 맞으세요?” 담당자가 입을 떡 벌렸다. “저 원래 이런 사람인데요.”
나는 능청스레 쏘아붙였다.
한번 목소리를 내니 용기가 붙었다. 이후 청탁 메일을 받으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고료를 일정 정도 인상해 주실 수 있을지 여쭙습니다.’, ‘해당 계약서 조항은 다음과 같이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구는 대개 수용되었고, 걱정과 달리 일도 끊이지 않았다. 그때 처음 맛보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 손에 쥐는 기쁨을.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노동 자체에 매몰된 나머지 그것의 정당한 대가와 존중을 요구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내 권리를 찾아주길 바랐다.
오래전 내가 원고 청탁했던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자신은 고료가 선입금되지 않으면 절대 원고를 넘기지 않는다고. 젊은 시절 수없이 고료를 떼인 끝에 세운 원칙이라고 했다. 그렇게 먼저 용기 내어 길을 터준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이만한 권리나마 누릴 수 있는 것일 테다. 지금 내가 내는 목소리도 언젠가는 반드시 누군가의 권리로 이어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절로 허리가 펴진다. ‘나’ 개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져 ‘우리’의 외침이 되고, 불합리한 노동 현장을 바꾼다는 사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늦게 깨달은 만큼 밀린 숙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