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일여행
파도와 커피 향이 빚어낸 계절
무해한 산책록
강릉
여름의 뜨거움이 가시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강릉의 풍경도 조금씩 표정을 바꾼다. 짙푸른 바다와 세월을 품은 고택, 잔잔한 호수, 그리고 깊어가는 계절만큼이나 감미로운 커피 향까지. 강릉은 유명한 곳보다 마음에 남는 장면이 많은 도시다. 계절이 완전히 옷을 갈아입는 길목, 강릉에서 즐기는 가을 산책.
글. 김주희
사진. 오충근
감미로운 가을 한 잔, 안목카페거리
강릉의 가을은 커피 한 잔에서 시작된다.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천천히 한 모금. 안목의 가을은 그렇게 여유롭게 번져간다. 안목카페거리에 들어서면 바다를 향해 열린 카페들이 즐비하다. 여름의 안목이 활기찬 바다를 품고 있다면, 가을의 안목은 조금 더 느긋하다. 한층 낮아진 햇살이 수면 위에 길게 번지고, 선선한 바람이 카페 안팎을 오간다. 바다소금을 더한 시그니처 커피나 고소한 커피콩빵 등 특색 있는 메뉴를 골라보는 재미도 있다. 꾸덕한 크림이 흘러내리듯 올라가거나 카카오 파우더가 소복이 내려앉은 음료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에 담기에도 좋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파도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느려진다. 굳이 일정을 채우지 않아도 좋다. 안목에서는 이런 느슨한 시간이 꽤 근사하다.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한 여유를 따뜻한 한 끼로 이어가 보자. 강릉을 대표하는 별미, 초당순두부는 담백하고 고소한 풍미가 매력적이다. 따끈한 순두부에 간장 양념을 곁들여 먹다 보면 속이 편안해지고 마음도 한결 차분해진다. 네모난 두부를 튀겨 치즈와 으깬 두부를 더한 두부떡볶이와 은은한 단맛의 초당순두부 젤라토 등 트렌디한 메뉴도 즐길 수 있다.
취향 따라 골라 만나는 강릉 바다
강릉에서는 바다를 고르는 일에도 취향이 필요하다. 해안선을 따라 조금씩 자리를 옮길 때마다 바다의 표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릉에서는 어디로 갈지보다 어떤 바다를 만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도 좋다. 어떤 바다를 선택할지는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다. 그날의 마음이 이끄는 곳에 머물러보자. 같은 바다라도 여행자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올 테니까.
카페에 앉아 바다를 오래 바라보고 싶다면 안목해변으로 향해보자. 커피 향과 파도 소리가 나란히 이어지는 풍경은 강릉을 여행하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 중 하나다. 조금 더 고요한 바다를 원한다면 송정해변이 잘 어울린다. 해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가벼워진다. 탁 트인 풍경 앞에서 시원한 바다를 마주하고 싶다면 경포해변도 좋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수평선이 만드는 장대한 풍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열어준다. 반면 주문진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조금 더 생생한 동해의 표정을 만날 수 있다. 항구와 어촌의 풍경이 어우러진 바다에서는 관광지의 풍경과는 또 다른 강릉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고택과 정원이 품은 온기 속으로, 선교장
바다의 푸른 풍경을 뒤로하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서면 강릉은 오래된 시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을 간직한 선교장은 고택과 정원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공간이다. 단정한 기와지붕과 낮은 담장, 오래된 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 사이로 계절의 기운이 은은하게 내려앉는다.
선교장을 거닐 때는 서둘러 다음 장소로 향하지 말 것. 고택의 처마 끝에 머문 하늘을 바라보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움직임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보자. 계절을 머금은 나무와 정갈하게 가꿔진 정원이 어우러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오래된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마주하는 가을빛만큼은 매년 새롭다. 전통문화 체험을 비롯해 고택의 멋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문학의 향기를 따라가고 싶다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추천한다. 두 문인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공간을 천천히 거닐며 강릉이 품어온 문화적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고요한 정원과 오래된 나무, 문장과 사유가 머무는 공간에 잠시 마음을 내려놓아보자. 강릉의 매력은 이렇게 조용한 장소에서 한층 더 깊어진다.
잔잔한 호수와 만난 느긋한 오후, 경포호
강릉 여행을 느긋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면 경포호로 향해보자. 바다와 가까이 자리한 경포호는 파도 대신 잔잔한 수면 위로 계절의 풍경을 담아낸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하늘과 나무가 물 위에 포개지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수면 위 풍경도 가만히 흔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는 것도 좋다. 호수 주변으로 자전거길이 이어져 있어 가족, 연인, 친구와 나란히 페달을 밟기 좋다. 1인용부터 2인용,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다인승 마차형 자전거까지 다양하게 대여할 수 있어 여행 인원에 맞게 골라 탈 수 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나뭇잎이 살랑이는 길을 지나며 살아 숨 쉬는 자연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호수 둘레길은 약 4㎞. 한 바퀴를 돌아보며 달리는 동안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늦은 오후라면 노을이 호수 위로 번지는 순간까지 머물러보자.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수면 위에 길게 내려앉으며 여행의 끝을 아름답게 장식해 준다.
바다에서 시작해 고택과 정원을 지나 호수에 이르는 길.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마음에 드는 해변을 골라 걷고, 오래된 공간을 거쳐 호수 앞에 이르면 강릉을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이 보인다. 많이 보고 바쁘게 움직이기보다, 마음에 드는 장면 하나에 오래 머무는 것.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 조금 느린 속도로 강릉을 만나보자. 서두르지 않았기에 더 선명해지는 하루, 강릉의 가을은 그렇게 완성된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로스팅된 원두의 깊은 향,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냄새
여행은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