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일
metaverse
헤드셋을 쓰면, 박물관이 걸어 나온다
메타버스 박물관 큐레이터
헤드셋을 쓰는 순간, 관람객은 런던의 대영박물관 한복판에 서 있다. 옆으로 한 걸음 옮기면 파리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오고, 또 한 걸음 더 가면 천 년 전 고구려 무덤의 벽화가 사방에서 살아 움직인다. 박물관이 더 이상 ‘건물’이 아니라 ‘경험’이 되는 시대. 그 변화의 한복판에 새로운 이름의 직업이 있다. 바로 메타버스 박물관 큐레이터다.
자료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모나리자
전통적인 큐레이터는 동선과 조명을 두고 고민한다. 어느 벽에 무엇을 걸지, 캡션의 문장은 몇 줄이 적당한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호흡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메타버스 큐레이터의 책상 위에는 비슷한 고민이 놓이되 재료가 달라진다. 벽 대신 좌표, 조명 대신 셰이더, 동선 대신 인터랙션이다.
영국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은 ‘버추얼 비짓(Virtual Visits)’ 프로그램으로 60개가 넘는 갤러리를 구글 스트리트 뷰 기반 가상 공간에 풀어놓았다. 책상에 앉아 이집트관과 그리스관 사이를 오가는 일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Louvre Museum)은 2019년 박물관 사상 첫 VR 콘텐츠 〈유리 너머의 모나리자(Mona Lisa: Beyond the Glass)〉를 공개했다. 큐레이터들이 10년에 걸쳐 쌓은 연구가 8분짜리 체험으로 압축됐다. 유리 너머에서는 닿지 않던 거리가 가상 공간에서는 손끝만큼 가까워진 셈이다.
반가사유상이 마주 보는 가상의 정원
국내 박물관의 발걸음도 빠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0년 5월 ‘디지털 실감 영상관’을 열었다. 8K 해상도로 펼쳐지는 〈강산무진도〉 파노라마, 안악 3호 무덤·덕흥리 무덤·강서대묘를 사방 영상으로 재현한 고구려관이 대표적이다. 천 년 전 벽화가 사방에서 살아 움직이는 광경은 도록 사진으로는 결코 전해지지 않는 종류의 감각이다.
같은 박물관이 제페토(ZEPETO)에 연 ‘힐링 동산’에서는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이 함께 놓여 있다. 실제 전시실에서는 별도의 공간에 모셔진 두 유물이 가상의 정원에서야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게 된 풍경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역시 상설전시관 3 ‘한국인의 일생’을 제페토 안 ‘네 컷 사진관’으로 옮겨, 출생과 관혼상제의 의례를 게임의 문법으로 다시 썼다. 사진 한 장을 남기려고 청소년 관람객들이 전시를 ‘플레이’하기 시작한 것은 이 직업이 다루는 변화의 작은 단면이다.
제페토 힐링동산
기술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큐레이터의 시선
가상 공간은 현실의 물리 법칙에서 자유롭다. 사라진 도시를 다시 세울 수도, 박제된 동물을 다시 걷게 할 수도, 관람객을 그림 안쪽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다만 자유로움이 곧 좋은 전시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가능성이 많아질수록,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길지 판단하는 안목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메타버스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의외로 균형감각에 가깝다. 미술사와 역사학의 깊이 위에 3D 모델링, 인터랙션 설계,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얹히고, 그 위에 다시 ‘사람’이라는 오래된 질문이 놓인다. 플랫폼은 자주 바뀌고 기술은 빠르게 낡지만, 어떤 이야기를 어떤 결로 전할지 결정하는 시선만큼은 좀처럼 낡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