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일여행

땀이 빚어낸 발효의 시간
사계절 양조장 기행

술 익는 마을

누룩 한 줌, 쌀 한 됫박, 그리고 기다림. 술은 본래 곡식을 거둔 농부의 거친 손과, 항아리 곁을 떠나지 못한 장인의 새벽잠을 먹고 자란다. 한 잔의 막걸리 속에는 모내기철의 허리 통증과 추수기의 환호가, 한 모금의 와인 속에는 한여름 뙤약볕과 한겨울의 정적이 함께 녹아 있다. 노동이 술이 되고, 술이 다시 노동을 위로하는 오래된 순환. 그 발효의 시간을 따라가 본다.

글. 편집실  사진 제공. 한국관광공사(김지호, 이범수)

가양주(家釀酒)의 향수가 흐르는 곳,
경기 포천 산사원

포천의 물맛은 예부터 술 빚는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북정맥 자락에서 흘러내린 연수(軟水)는 발효 미생물에게 더없이 너그러운 환경을 제공한다. 배상면주가가 운영하는 산사원은 이 지역의 수질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주의 어제와 오늘을 한자리에 풀어놓은 복합문화공간이다.

야외 정원 ‘세월랑(歲月廊)’에 가지런히 도열한 술 항아리들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전통술박물관에서는 소줏고리와 옹기 술독 너머로 가양주의 계보를 따라가볼 수 있고, 입장료 4천 원으로 15종 이상의 배상면주가 술을 시음할 수 있어 애주가들 사이에선 ‘성지’로 통한다. 산사춘과 느린마을 막걸리는 물론, 계절마다 바뀌는 칵테일도 한 잔씩 맛볼 수 있다. 가양주 빚기 체험은 직접 쌀과 누룩을 버무려 빚은 술을 병에 담아 가져갈 수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특히 인기다.

오미자 와이너리 오미나라

오미(五味)가 발효된 산중 와이너리,
경북 문경 오미나라

문경새재 초입, 백두대간이 한 차례 숨을 고르는 자리에 오미나라가 있다.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을 한 알에 품은 오미자는 일교차 큰 해발 300~500m 산간분지를 좋아한다. 문경이 국내 오미자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이유다.

2008년 세계 최초의 오미자 와이너리로 문을 연 이곳은 정통 샴페인 공법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결’을 비롯해 한국 와인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해왔다.

2025년에는 참발효어워즈에서 ‘오미로제 연’이 한국와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았고, 프랑스 대통령 만찬 건배주로도 올랐다. 와이너리 투어는 발효실·증류실·오크통 숙성고를 차례로 거치며, 베이직 코스 5천 원(시음 1잔 포함)·스페셜 코스 1만 원(시음 다종)·나만의 기념주 만들기 3만 원으로 세분화돼 있어 취향대로 고를 수 있다.

전통주 박물관 산사원

산사원 야외정원

폐터널이 빚어낸 시간의 와인,
경북 청도 와인터널

경부선 옛 철길이 멈춰 선 자리, 1905년에 개통된 송금터널이 다시 깨어난 곳이 청도 와인터널이다. 122년 세월을 견뎌낸 화강암 아치 안으로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15도 안팎의 서늘한 공기가 발끝을 감싼다. 굴착 노동자들의 곡괭이 자국이 그대로 남은 벽면을 따라 오크통과 와인병이 도열한 풍경은, 노동의 흔적이 어떻게 또 다른 노동의 결실을 품게 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이곳을 채우는 술은 ‘씨 없는 반시’로 유명한 청도산 감으로 빚은 감와인이다. 세계 최초의 감 발효주로 알려진 청도감와인㈜이 2006년부터 이 터널을 숙성고로 활용하면서, 폐선 부지는 연 100만 명이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터널 안쪽으로는 시음 바와 포토존, 와인 카페가 이어지고, 드라이·스위트·아이스와인까지 종류별로 한 잔씩 맛볼 수 있다.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청도역에서 차로 10분 거리라 대중교통 여행자에게도 너그러운 코스다.

와인터널

와인터널

술의 역사가 잠든 수장고,
전북 완주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

여러 가지의 술을 한자리에서 즐길 방법도 있다. 경각산과 구이저수지가 마주 보는 자리, 물방울이 퍼져나가는 형상을 모티프로 한 박물관 한 채가 들어서 있다. 2015년 개관한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술’을 주제로 삼은 국공립 박물관으로, 무려 5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품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태곳적 토기 술잔부터 지역마다 형태가 다른 소줏고리, 사라진 양조장의 간판과 라벨까지 한국인이 마셔온 술의 궤적이 시간순으로 펼쳐진다. 단순한 진열을 넘어 누룩방·발효실을 재현한 디오라마가 노동의 풍경까지 되살린다. 성인 관람객을 위해서는 막걸리 빚기, 하우스맥주·와인·칵테일 만들기 같은 체험이 운영되고, 어린이 대상 술병 꾸미기 프로그램도 선착순 무료로 진행된다.

“곡식은 흙의 노래고,
술은 그 노래를 품은 사람의 시(詩)다.
잔을 드는 짧은 순간만큼은,
노동도 세월도 고개를 숙인다.”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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