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
1964년 언론계에 입문,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초대 사무국장, 한국외국어대 언론학과 교수·동(同)사회과학대학장·정책과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복사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옛날 신문(古新聞)들을 카메라로 찍고 수작업으로 언론 관련 자료집, 문헌 해제, 신문·잡지의 색인들을 만들어 언론사 연구의 기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월간 내일」은 1967년 우리 사회가 합심하여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무렵에 창간되었다. 생산성, 수출, 건설과 같은 성장과 국가발전이라는 거대 화두가 노동의 가치에 앞섰던 시대였다. 창간 당시 제호는 「산업과 노동」. 산업 발전이 노동에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은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했을 뿐, 오늘날은 당연시되는 노동조합 결성을 통한 노동자의 권익옹호는 먼 나라,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주(週) 단위 근무 시간의 제한 같은 근로기준법도 시행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땀과 창의력으로 선진 산업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산업(기업)과 노동이 때로는 갈등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힘을 합쳐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이다.
「월간 내일」은 창간 이래 58년 동안 우리 사회의 급속한 발전과 이에 따르는 진통과 격변 속에서 잡지 창간의 취지를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통권 600호의 역사는 이 잡지가 고용과 노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증명한다. 발행 주체인 고용노동부가 「월간 내일」의 역할에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계의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 왔기에 600호의 지령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잡지는 발행 당시 사회의 수준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가 된다. 그 시대 이념과 지식의 풍토가 잡지의 내용에 담겨 있다. 종이의 질, 인쇄의 정교함 등은 발행 시점 그 사회의 경제를 반영한다. 흑백 갱지에 인쇄된 잡지에서 고급 용지에 화려한 컬러 인쇄까지, 디자인과 외관만 보아도 발행 당시 그
사회의 다양한 지표를 유추할 수 있다. 몇만 년 전 화석이나 고대 유물에 인류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생명체가 기후나 환경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아 번성 또는 소멸하듯이 잡지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는다. 「월간 내일」은 흑백 인쇄에서 컬러로 겉모습이 바뀌면서 격월간에서 월간으로 발전했고,
제호도 「산업과 노동」에서 「노동」을 거쳐 「월간 내일」이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이 잡지의 성격, 우리 사회 고용과 노동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1974년 8월 재해사례
미국은 잡지 왕국이다. 국토가 너무 넓어 신문이 전국에 배달되기는 어려웠다. 동부에 위치한 수도 워싱턴이나 대도시 뉴욕에서 발행된 신문이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배달되려면 며칠이 걸려야 했고, 서부 발행신문의 동부 배달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래서 발달된 매체가 잡지였다.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1922)와 주간 ‘타임’(1923)에 이어 ‘뉴스위크’(1934), ‘라이프’(1936) 등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잡지들이 한 때 전성기를 누렸다. 미국을 상징하는 이들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잡지들은 전 세계로 보급 범위를 넓히면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 잡지도 TV에 이어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이 가져온 언론 환경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으면서 발행을 중단하거나 위축되어 변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교통수단의 발달, 멀리 떨어진 지역의 동시 인쇄, 실시간에 전달되는 정보의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대량 부수 잡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특수분야만을 다루는 이른바 ‘스페셜 인터레스트’ 잡지, 다른 말로 ‘전문지’ 시대로 바뀌었다. 우리의 경우 「월간 내일」이 바로 특수분야를 다루는 전문지인 것이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끝나가던 1950년대 초반부터가 한국 잡지의 르네상스기에 해당한다. 미국 잡지 역사와 비교하면 대략 20년의 시차가 있었다. 우리는 1960년대에 ‘주간지 붐’이 일었다. 1964년 9월 한국일보가 창간한 ‘주간한국’에 이어 1968년부터는 여러 신문이 경쟁적으로
주간지를 창간했다. 1980년대에는 여러 기업체가 다투어 사보(社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제발전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월간 내일」은 이 같은 환경에서 탄생했다.
책이나 잡지의 누적된 기록은 통권(通卷)이고, 나이는 지령(誌齡)이다.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호가 바뀌면서도 이어지는 지령으로 계산하면 「월간 내일」의 지령 1호는 1967년 3월에 창간된 격월간 「산업과 노동」에서 시작하여 통권 600호를 헤아리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에도 우리나라 잡지 가운데는 창간호가 종간호인 경우가 많았다. 검열난, 필자난, 경영난이 잡지 발행의 세 가지 어려움이었다.
이렇게 「월간 내일」이 58년 세월 동안 제호를 바꾸면서도 통권 600호를 이어온 것은 우리 잡지 역사에는 매우 드문 일이다. 잡지 환경과 가치관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는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월간 내일」의 편집 방침은 일관성을 유지해 오면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관성이란 고용과
노동이라는 우리 생존에 관련되는 주제다. 노동은 신성하며, 노동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노동의 개념을 탐색하는 역할을 해 왔기에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1979년 6월 노사만화
노동이라면 육체노동이 먼저 떠오르지만, 현대사회는 육체노동과 함께 정신노동의 중요성도 널리 인식되고 있다. 상징적인 사례로 언론계를 들 수 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조 사태가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 33명이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언론노조는 회사와의 갈등으로 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기자들이 해고당하고, 조합의 합법성 여부를 법원에서 판단을 구하는 사태까지 갔지만 노조는 와해되고 주된 역할을 맡았던 기자들은 해고되었다. 13년 뒤인 1987년 10월에 한국일보 기자들이 노조 설립에 성공한 이후에야 언론노조가 활성화되었다. 동아일보(11. 17.), 중앙일보(12. 1.), 서울MBC(12. 9.), 코리아 헤럴드(12. 14.), 조선일보(1988. 10. 25.)순으로 노조 설립이 이어졌다.
1986년 12월 해외취업근로자 수기
1987년 11월 26일에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창립되어 언론계 내부와 산업계는 물론이고 정치, 사회, 문화 각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문화방송(MBC)노동조합과 지방문화방송노조연합회는 전국조직인 전국문화방송노동조합연맹(1994. 9. 5.)을 결성해서 장기간의 파업을 주도하는
사태도 있었다. KBS와 함께 공영방송 노동조합의 힘이 너무 과대한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단위노조 설립에서 전국에 걸친 대규모 노조연맹에 이르는 언론사의 노조 역사는 정신노동 가치의 변천을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한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월간 내일」은 우리의 고용과 노동시장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고, 이를 수렴하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래서 잡지의 수명도 오래 계속된 것이다. 고용과 노동이 활성화되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면서 「월간 내일」의 발전을 기원한다.
1990년 6월 현장을 찾아서